산티아고 북쪽길 | 최악의 날은 곧 최고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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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레스 마을에서 결성된 팀 어니언의 일곱 멤버는 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언어능력자 달리아,
미국 하이틴 드라마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앤,
가장 연장자인 데다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는 실리언,
선하고 순박한 인상의 헝가리 소녀 한나,
온톤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독일인 두 명에다가 평범한 한국 대학생이었던 나까지.
순례길이 아니었다면 모이기 힘들 독특한 조합이었다. 국적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한국 등 다양했다.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세 명씩 나뉘어 걷게 됐다. 난 다른 친구들과는 온톤에서 조금씩 대화를 나누었지만 독일 친구들과는 안면만 튼 상태여서 그들과 통성명부터 했다. 어제부터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던 에너자이저의 이름은 얀, 비교적 점잖고 키가 큰 친구는 모리츠였다. 난 내 이름의 끝 글자를 따 ‘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는데, 그 말을 들은 얀은
“‘영’이라고? 너무 ‘얀’이랑 비슷하잖아!”
라고 하더니 제멋대로 나를 ‘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얀’의 독일어 철자가 Jan인데, 이걸 그냥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었다.
얀은 초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고수처럼 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 가방이 너무 커!”, “이런 오르막에서는 보폭을 줄여야 해!” 딴에는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내가 알겠다고 대답을 해도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자 그냥 고역스러운 잔소리로 느껴졌다. 무거운 배낭보다도 그 끝없는 참견이 더 고되었다.
얼마간 걷다 선두에 걷던 실리언과 모리츠가 쉬는 시간을 선포했다. 난 ‘드디어 살았다!’하며 바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잔! 일어나! 그렇게 앉았다 일어나면 더 힘들어!”
라는 얀의 불호령이 내려졌다. 옆을 보니 나란히 앉아있는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억울함이 차올랐다.
‘왜 나한테만 저러는 거야…’
다행히 옆에서 달리아와 실리언이 나보고 그냥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해줘서 겨우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5분이 딱 지나자마자 얀은 선수들을 독려하는 코치처럼 박수와 함께 우렁차게 말했다.
“자자, 다들 이제 출발할 시간이야! 일어나!”
곧 모리츠까지 합세하여 출발을 외쳤고, 우리는 약간의 절망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마을의 끝자락에는 갈림길이 있었다.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노란 화살표는 산길을 향하고 있었지만 실리언은 자신이 지름길을 안다며 우리를 차도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시간과 거리를 단축시켰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지만, 그 길이 지옥의 오르막이라는 것을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늘이 없어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길, 지나치게 단조로운 풍경과 끝없이 굽이치는 오르막, 이따금 위협적인 속도로 옆을 쌩하며 스쳐가는 차들까지… 길 자체의 교통량은 거의 없었지만 멀리서부터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재빨리 가드레일 쪽으로 붙기를 반복하는 일은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적당히 푹신한 흙길과 달리 딱딱한 아스팔트에서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해지는 충격이 고스란히 발목과 무릎으로 전달되어 급격히 피로가 쌓였다. 쾌활하던 다른 일행들의 말소리도 점차 줄어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하던 하늘에 노란빛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겨우 고단한 산길에서 벗어났다. 마을길로 접어들자 저 멀리서 성당 건물이 빼꼼 보였다. 그것을 본 한나와 얀, 모리츠는 환호성을 울리며 달려가버렸다. 이미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관성에 의지해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던 나에겐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쟤네는 심장이 세 개일 거야…’
양손으로 배낭끈을 잡은 채 터덜터덜 남은 거리를 마저 걸어 드디어 성당에 도착하니 성당 앞 인도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알베르게가 바로 보이는 거리여서 의구심이 들었다.
‘어라, 왜 알베르게로 바로 가지 않은 거지?’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 일행 말고도 성당 앞 도로를 방황하는 순례자가 몇몇 더 눈에 띄었다. 그때 알베르게에서 호스트로 보이는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더니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외쳤다.
“원 베드!”
아뿔싸, 시간이 늦어서 알베르게에 남은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순례길을 시작할 때부터 날 따라다닌 악몽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근처에서 서성이던 순례자 한 명이 잽싸게 팔을 높이 흔들며 알베르게로 들어갔고, 그대로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실리언은 말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저 조금 아쉽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음, 여기 알베르게도 못 가겠네? 어떻게 할까? 다음 마을로 가볼래?”
곳곳에서 일행들의 좌절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40km의 여정을 달리기 시합으로 마무리지을 만큼 체력이 좋은 한나와 얀, 모리츠까지도 이번에는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또다시 10km를 걸어야 했다. 거리도 문제이지만 이미 그곳의 알베르게에 일곱 명의 자리가 남아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배낭을 베개 삼아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냥 여기서 이렇게 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차라리 내 말에 솔깃한 듯한 일행들의 표정을 죽 둘러본 실리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도를 보는 듯 손가락으로 화면에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던 실리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버스 타고 20분 정도만 가면 내 보스가 운영하는 여름 펜션이 있는데 거기서 하루 묵을래? 아마 아직은 영업을 안 할 거야, 내가 한 번 연락해 볼게!”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일행의 상사의 집이라니! 뭔가 부담스러운 게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일행들은 약간 머뭇거렸지만 다른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지 다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언은 씩 웃더니 이탈리아어로 무언가 통화를 시작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코너를 돌아오더니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제야 일행들 사이에 우뚝 서있는 버스정류장 표시가 눈에 띄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한테 방해되지 않으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실리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짐 챙겨서 이 버스에 타!”
갑자기? 우리는 상황도 모른 채 얼떨떨하게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차례대로 요금을 지불하며 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을 모두 태운 즉시 출발한 버스는 우리가 10분이 넘게 걸어온 거리를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앉아 수 킬로미터를 단 몇 분만에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이 엄청난 사치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빌바오에서 기차를 탄지 하루 만에 다시 버스를 타다니. 굉장히 불성실한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다가 산 중턱쯤 되는 곳에 섰다. 우리는 실리언의 지휘에 따라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큰 슈퍼마켓에서 장을 봤다. 인원이 많다 보니 필요한 것도 많았다. 생수도 2리터짜리 페트병 6개짜리 묶음이 총 두 묶음이나 필요했다. 다들 계산한 식료품들을 나눠서 조금씩 들었고, 나도 생수 묶음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얀이 그걸 낚아챘다. 그의 다른 손엔 이미 한 묶음이 들려있었고, 내 것까지 해서 양손에 하나씩 들게 되었다.
“앗 내가 들어도 되는데..!”
“이렇게 양손에 들어서 균형 맞추는 게 더 편해. 넌 저기 와인병이나 들어”
의연하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얀의 뒷모습이 이채로웠다. 가벼운 말괄량이인 줄만 알았던 얀에게 저런 모습도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난 그냥 빨리 짐을 내려놓고 씻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문 앞에 섰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안을 들여다본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와! 여기 너무 좋은데?"
일행들도 저마다 집을 내려놓고는 감탄을 연발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외딴 산장이었는데, 객실 내부는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보통의 알베르게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깨끗하고 프라이빗한 시설이었다. 거실은 일행이 전부 서있기만 해도 꽉 차버렸고, 두 개의 작은 방에는 침대가 3개밖에 없어서 일곱 명이 다 자기에는 공간이 터무니없이 좁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들이 거실 소파나 바닥에 침낭 깔고 자면 되지 않을까?"
그때 실리언이 얀과 모리츠를 밖으로 부르더니 옆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남자 일행들을 위한 방도 별도로 배정한 것이다. 상사에게 건물을 통째로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듯했다. 실리언의 보스가 부른 값은 사립 알베르게의 평균 가격과 비슷했는데, 인구밀도와 시설, 서비스(?)까지 고려하면 가성비는 훨씬 좋았다. 한결 뽀얀 얼굴이 된 앤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동여맨 채 샤워부스에서 나오며 감격스러워했다.
"스포츠타월이 아닌 진짜 수건이라니..! 여긴 천국이야..."
모두가 샤워를 마친 후 누군가 뒷산으로 노을을 구경하러 가자는 제안을 했고, 다른 일행들은 모두 원기회복이 되었는지 흔쾌히 달려 나갔다. 하지만 원래 계획의 두 배 가까이 걸어버려 도저히 더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나는 미련 없이 침대로 달려갔다.
얼마 후 달리아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미 바깥은 해가 다 넘어가고 어둑해져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보니 긴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와, 이걸 언제 다 한 거야? 나도 부르지…”
괜히 미안해진 내 말에 달리아가 웃으며 답했다.
“실리언과 모리츠가 거의 다 했어. 우리도 별로 한건 없어”
그 말에 접시를 나르던 모리츠가 말했다.
“실리언 덕분이지. 최고의 숙소에서 최고의 저녁까지 먹을 수 있겠어. 모두 실리언에게 박수!”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실리언에게 힘껏 박수를 보냈다. 실리언은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리츠는 촉촉한 눈으로 식탁 주변으로 모인 일행들과 식탁 위의 음식을 바라보더니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이건 축복이야. 우리 다 같이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해.”
건장한 체구와 다소 날카롭고 거친 인상의 겉과는 달리, 은근 감성적인 친구였다. 모리츠는 모두가 양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모이도록 한 뒤, 조용히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서로의 얼굴만 은은하게 보이는 어둠 속에서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모리츠의 기도문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기도문의 틈 사이로는 바람에 풀잎이 살랑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엄숙한 고요 속에서, 종교가 없는 나도 그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분위기와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다 함께 ‘아멘’을 외치며 기도가 끝났고, 눈을 뜬 모두의 얼굴에는 잔잔하지만 깊은 미소가 피어났다. 유독 길었던 하루를 함께 지나온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마주하자 전에 없던 유대감과 애정이 솟아올랐다.
저녁 메뉴는 실리언의 요리인만큼 정통 이탈리아 요리에 와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우리뿐인 산속 오두막에서의 만찬이라니. 낭만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모리츠가 튼 콜드플레이의 음악을 다 같이 따라 불렀고, 앤은 '다프트펑크'의 음악도 꼭 들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음악까지 더해진 밤은 더없이 풍족했다. 40km에 걸쳐 쌓인 피로와 여러 번의 작은 좌절은 잊힌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