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북쪽길 | Bilbao에서 Onton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7
빌바오에 하루를 머물며 충분히 휴식을 취했더니 출발 전날 저녁부터 몸이 근질거리며 다시 걸을 준비가 됐음을 알렸다.
내가 목표한 완주일을 맞추려면 쉬어간 하루만큼의 거리를 보충해야 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빌바오 다음 도시인 포르투갈레테까지는 걷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점프’를 했다. 이룬에서 빌바오까지 이어졌던 바스크 지방이 멀어지는 동시에 칸타브리아의 땅이 가까워왔다.
포르투갈레테에 발을 딛자 안개 낀 새벽 특유의 고요함이 나를 감쌌다. 아침의 생명력도 아직 웅크린 채 깨어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에 스며든 적막은 섣불리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포르투갈레테의 상징인 다리를 중심으로 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것을 느낀 건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앞뒤로 묵묵히 걷는 순례자들의 숨소리와 발소리 사이사이로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담긴 근육의 떨림은 또렷이 전달되었다.
포르투갈레테를 빠져나갈 즈음부터는 자전거길과 보행자 도로가 나뉜 잘 닦인 포장도로가 이어졌다. 주변에 건물도 거의 없어서 마치 차 대신 사람과 자전거를 위한 고속도로 같았다. 어느 지점에서는 가드레일 너머 아래로 차들이 쌩쌩 달리는 진짜 고속도로가 보여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늘은 많지 않았지만 이따금 잔디밭이나 벤치 등이 있는 녹지가 나타나 걷기에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점차 공기가 햇볕에 데워지는 게 느껴질 무렵, 문득 왼편에서 누군가의 장난기 섞인 목청이 울려 퍼졌다.
“헤에에에이~~”
고개를 돌리니 건장한 백인 남성 두 명이 조그만 각자 한 손엔 맥주캔을 쥔 채 잔디밭에 비스듬히 눕거나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흰색 런닝셔츠 차림으로 누워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올리고 있길래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있나 보다’ 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는 마땅히 불렀음직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하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저 차림새로 대낮부터 맥주를 까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 좀 더 자세히 본 순간, 그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등산 배낭에서 순례자들의 표식인 가리비가 달려있는 것을 간신히 발견했다. 그냥 같은 순례자가 반가워서 인사했던 모양이다.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는 한동안 등뒤로 이따금 그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도 순례자면서 스포츠경기 관객 마냥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났다.
몇 시간 후, 정수리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질 무렵부터는 풍경이 차츰 바뀌었다. 아스팔트길은 어느새 뻐걱거리는 나무 데크길이 되어 있었다. 거의 키높이까지 자란 온갖 잡초들이 무성한 들판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수평선이 나타났고, 이윽고 풀밭이 옅어지는 지점에서 해변이 시작되었다. 여름이었지만 해변은 시끌벅적하기보다는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잔잔한 파도를 맨발로 스치며 걷거나, 비치타월을 깔고 모래밭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해변이 끝나는 지점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그 흐릿한 경계에 서서 물살이 서로를 반기듯 덮치는 장면은 계속 봐도 신기했다. 다리 위에서 강과 바다를 넘나들며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여름의 싱그러움에 젖어들었다.
해변을 지나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끝없는 바다와 절벽이 훤히 펼쳐진 절경이 이어졌다. 해안가를 따라 아기자기한 데크길이 잘 깔려있어서인지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하거나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사진을 남기는 가족들이 곳곳에 보였다. 여름휴가를 맞아 들뜬 사람들과 그림 같은 풍경에 덩달아 신난 내 발걸음도 배낭의 무게를 잊은 듯 가벼워졌다.
좁은 길이 이어지다 갑자기 탁 트이는 구간을 만났을 때,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는 두 명의 순례자들이 눈에 띄었다. 분주히 활보하는 사람들 틈에서 움직임이 없는 그들의 실루엣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순례자들은 은근 나잇대가 높아서 또래를 만나기 쉽지 않은데, 그들은 멀리서 봐도 내 나이대로 보였다. 곧바로 호기심과 반가움이 일었다. 내 눈길이 느껴졌는지 그중 한 명이 나를 돌아봤고, 눈이 마주치자 스치듯 ‘올라 Hola!’하며 인사를 건넸다. 순례자들은 서로의 국적에 관계없이 처음 몇 마디는 “올라”, “께딸?(Que tal?, 영어의 How are you? 에 해당하는 표현)” 등 스페인어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나도 “올라!”라고 마주 인사를 건넸다. 더 말을 걸까 하다가 차분히 바다멍을 즐기는 그들의 휴식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지나쳐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잠시 멈춰 사진을 찍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몸을 살짝 튼 순간 계단을 올라오던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둘 중 앞쪽에서 걷던 금발의 아담한 순례자가 말을 걸었다.
“오늘 어디까지 가세요?”
“전 온톤으로 가요”
“오! 우리도 거기로 가요! 같이 가면 되겠다. 아, 나는 달리아, 이 친구는 앤 이에요.”
대학 친구 사이인 달리아와 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뉴욕에서 날아와 순례길을 함께 걷는 중이라고 했다. 무려 여덟 달 전부터 비행기표를 끊고 훈련까지 해서 온 준비성이 엄청 철저한 친구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시간을 확인한 나는 속도를 높였다. 온톤의 알베르게는 작다고 들었는데, 침대를 차지하려면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빨리 걷다가 발목에 무리가 오는 바람에 빌바오에서 멈춰야 했었는데, 낫자마자 그 사실을 잊고 어김없이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달리아와 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평하고 느긋한 얼굴이었다. 늦으면 침대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얘기하자 달리아가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괜찮아. 미리 전화해서 예약해 놨거든.”
전화 예약이라니. 난 생각도 못한 방법이었다. 문득 지금까지 본 알베르게 호스트 대부분이 영어를 쓰지 않아 소통에 애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어떻게 말을 했냐고 물어보자 너무 당연하다는 듯 “스페인어로 했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달리아의 부모님이 스페인에서 만난 사이라 집에서 종종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셔서 자신도 스페인어를 잘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예약이 꽉 차서 날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과 ‘이럴 줄 알았으면 스페인어 공부를 열심히 해둘걸’이라는 후회가 자꾸만 피어올라 대화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을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목적지인 온톤에 도착했다. 온톤은 50 가구는 있을까 싶은, 아주 한적한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듣던 대로 알베르게의 규모는 엄청 작았지만, 다행히 일찍 도착한 편이라 예약을 하지 않은 나도 침대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유일한 근심걱정을 해결한 나는 소일거리를 끝낸 뒤 오후의 자유시간은 혼자 바닷가에서 보내기로 했다. 사람이 거의 없어 해변을 통째로 빌린 듯 호화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위에 앉아 파도를 듣거나 낙서를 하거나 암벽등반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누렸다. 더없이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며 저녁시간이 다가왔고, 그날의 평화는 와장창 깨졌다. 알베르게가 있는 오르막에 들어서면서부터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도착해 보니 발갛게 상기된 채 킬킬거리며 건물 입구에 앉아있는 달리아와 앤의 모습이 보였고, 그 곁에는 놀랍게도 아침에 잔디밭에서 맥주타임을 즐기던 순례자들이 있었다. 아침에도 인상이 강렬했던 흰색 런닝맨은 아직도 전혀 지치지 않은 얼굴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얼핏 들어도 대부분이 온전한 문장보다는 “헤에에이!”, “유후!!”같은 추임새나 환호성, 뭔지 모를 의성어로 이루어진 소리들이었다. 이미 좀 취한 게 분명해 보였다.
달리아, 앤과 눈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어? 아까 낮에 잔디밭에서 맥주 마시던 분들이죠?”라고 아는 체를 하니 둘 중 비교적 점잖은 인상인 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린 독일인이거든요. 이렇게 날이 좋은데 맥주타임을 빼먹을 순 없죠!”
자연스러운 낮맥이 단번에 설명되었다.
기다란 테이블에 모든 숙박객들과 호스트가 모두 모여 함께한 저녁식사는 텐션이 엄청났다. 낮맥 독일인의 존재감이 단연 최고였지만, 그들 외에도 외향인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그 몫이 않은 에너지를 발산했다. 다행히 비교적 차분한 사람들도 꽤 있어서 난 그들 주변에 자리 잡았다. 낮에 만난 달리아, 앤과는 미드 이야기를, 처음 만난 다른 사람들과는 서로 간단한 소개를 나눴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가도 테이블의 반대편에서 한 번씩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질 때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돌아갔다. 극 외향형 런닝맨 독일인은 이제 소매가 있는 상의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원초적이기까지 한 끼를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스페인인은 독일인이 뭐라고 하는 족족 빵빵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때로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까지 들렸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에 같이 웃음이 났지만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기가 쫙쫙 빨려 있었다. 그들만의 행복한 시간(나머지에겐 인고의 시간)은 소등 시간인 밤 10시가 넘어서도 이어졌고, 결국 호스트가 직접 나서 잘 시간에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야 했다.
밤의 소음에서 벗어나 겨우 잠에 들었지만, 이 고요함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침대의 움직임과 소곤거리면서 부시럭부시럭 짐을 싸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내 윗침대와 옆침대를 쓰던 리투아니아 삼인방이 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의 스페인은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는 편이라 어지간하면 밝은 하늘을 볼 수가 있는데 아직 창밖이 캄캄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새벽 4시밖에 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소리조차 소음이 되어버리는 시간에 세 명이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공사장 소음과 별 차이가 없게 느껴졌다.
리투아니아 삼인방이 깨운 게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그날따라 유난히 새벽 일찍 출발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잠을 제대로 설쳐서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음에도 전혀 개운하지가 않았다. 멍하고 찌뿌둥한 상태로 알베르게 마당 벤치에서 신발끈을 묶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녁 먹으며 친해진 키라가 두 손으로 배낭을 끙끙 옮기며 나오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잘 잤어? 난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니네.”
내 옆침대였던 키라 역시 잠을 방해받은 모양이었다. 난 나 역시 잠을 잘 못 자서 멀리 가진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 게다가 나는 빌바오에서 발목을 치유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키라도 무릎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 건강을 잃은 콤비를 이룬 우리는 되는 데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키라는 직업정신을 십분 발휘해 내 부족한 영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더구나 리액션도 엄청 잘해줘서 대화가 편하고 유쾌하게 잘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 보는 사람과 몇 시간 동안, 그것도 영어로 하는 소통은 아무리 티키타카가 잘 되는 상대라도 함께 10km 넘게 걸으면서 이어가기는 좀 버거웠다. 그래서 중간에서 헤어질 때는 아쉽긴 했지만, 혼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해방감이 슬며시 찾아왔다. 해드폰을 쓰고 한국어 노래를 마음껏 들으며 속도를 높여 걸으며 역시 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한 사람임을 실감했다.
마침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조용한 휴식을 기대하며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런데 알베르게로 보이는 집 앞에 배낭 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던 그 무리는 다름 아닌 온톤에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사람들이었다. 달리아와 앤 이외에도 익숙한 몇 사람이 보였다. 낮맥 독일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전날 밤의 소음이 떠올라 살짝 아찔했지만 나를 알아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는 그들에게 나도 반가움을 끌어모으며 마주 인사했다. 다들 전날 그렇게 놀아놓고도 아직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때 이탈리아인 실리언이 앞으로 나섰다.
“너 혹시 오늘 목적지가 여기였니?”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게 하는 어조였다.
“네. 그런데요?”
“음 저런. 여기 알베르게가 문을 닫은 것 같아. 그래서 우리는 10km 더 갈 생각이야. 제일 가까운 다음 알베르게는 10km를 더 가야 있거든. 너도 우리랑 같이 갈래? 싫으면 안 그래도 되지만 선택지가 별로 없을걸?”
한마디로. ‘지금 우리랑 동행하는 게 너한테 더 좋을걸?’이라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피곤한 데다 극 EEE들 사이에 섞이려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했다. 하지만 뭐 별 수 있나. 지름길을 안다며 열심히 경로를 설명하는 실리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좀 친해진 달리아와 앤, 선하고 순박한 인상의 한나도 일행이어서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같이 가요.”
내 까미노 여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어니언 팀’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격한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해 주는 새 친구들에게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며 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걸음이 시작된 후에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일행들을 보며 속으로 ‘이게 잘한 선택인 걸까..?’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