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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차로 6분, 걸어서 60분,그리고 의리의 60km

산티아고 북쪽길 |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람에게서

by 이끼레몬소르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17


이튿날, 나와 한나, 올리비에는 마당에 모여 서로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나는 등산 스틱을 양손으로 짚고 한쪽 다리를 앞으로 구부린 채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고(으으, 근육이 몽땅 다 굳어버렸나 봐..) 올리비에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천천히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었다. 어제 아침은 당연하듯 혼자였지만 하루아침에 한 팀이 된 동료들이 생기기도 한다. 새삼 자연스럽게 두 친구를 기다리던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낯섦이 꽤 즐거웠다. 난 한나를 따라 스트레칭 자세를 해봤는데, 햄스트링이 굳어버린 쫀드기를 억지로 늘리는 듯한 질감이 근육에서 전달되었다. 이런 상태로 무사히 남은 거리를 완주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래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함께 길에 올랐다.


우중충했던 하늘이 맑게 개어 산뜻한 오전이었다. 숲 속 오솔길은 평탄하고 곳곳에 작은 계곡과 그 위를 건너는 아기자기한 나무다리가 놓여있어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한나와 올리비에는 어제 둘이 걷는 동안 했던 게임을 알려주었다. 한 명씩 번갈아가며 자기 자신에 관한 사실 세 가지를 말하는데, 그중 거짓을 하나 섞는 게임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답을 쉽게 맞히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보다 더 거짓말 같은 진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화 등을 잔뜩 꺼내었는데, 덕분에 서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더 알아간 것은 물론 온갖 흥미로운 썰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한때 소풍을 온 듯한 10대 무리들로 길이 엄청 혼잡하고 시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 몇 분간의 소음마저 평화롭던 오전이었다.




중간에 들른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한나가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는 듯하더니 자못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한나가 입을 열었다.


“난 오늘은 여기까지만 걸을까 고민 중이야.”


나와 올리비에는 한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깜짝 놀랐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은연중 당연히 오늘 하루만큼은 셋이 함께 보낼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금껏 밝게만 보였던 마을 분위기도 갑자기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한나도 그게 아쉬운지 무거운 표정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내 친구들이 한두 시간 뒤에 이 마을에 도착한대.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나고 싶어. 근데 너랑 올리비에랑도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아.”


들어보니 그 친구들의 오늘 목적지는 이 마을이었지만 우리가 목표로 정한 곳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한나는 친구들이 우리가 목표로 잡은 마을까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루동안 60km를 넘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딜레마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접시를 다 비우고 다시 출발해야 할 시간이 왔다. 한나는 우리와 함께 몇 걸음 걷더니 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일단 걔네를 기다릴게요. 하지만 오늘 여러분이 있을 그 마을까지 꼭 가겠어요. 그 친구들을 설득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따 봐요!”


난 그 친구들이 한나의 부탁에 따라 60km를 걸어줄지 의구심이 들어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한나와 인사를 나누고 올리비에랑 둘이서 걷기 시작했다. 한 명이 빠졌을 뿐인데 분위기는 사뭇 차분해졌다. 해가 중천에 뜬 무더운 시간대라서 우리는 더욱 말을 아꼈다. 이따금 동네 개가 이상한 소리로 짓거나 시원한 콜라를 마시러 바에 들어갈 때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숲길 한켠에 누워있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지도를 살폈다. 남은 거리는 5km 남짓. 도보로는 약 한 시간이 걸린다고 나와 있었다. 호기심에 차로는 얼마나 걸릴지 눌러보았다. 6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하하! 차로 6분 만에 갈 수 있대요! 도대체 우리 왜 걷고 있는 거야!”

“그렇게 치면 이룬에서 산티아고까지도 10시간 정도면 갈 수 있어. 우리가 바보라서 걸어온 거지 뭐.”


하긴, 충분히 편하고 빠른 수단이 있는대도 두 발로 걷기를 고집하는 게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짓이기도 하다. 난 그 말이 맞다고 깔깔거리며 맞장구를 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다시 바보처럼 걸을 시간이야.”




어떤 일이든 마지막 한 시간은 굉장히 더디게 가는 법이다. 그만큼 거리가 줄지 않는 5km도 없다.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가리비의 표지판이 나왔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이정표가 아니었다. 가리비 밑에는 줄곧 상상만 해온 숫자가 적혀 있었다.


“우와, 100Km래요! 산티아고까지 이제 100km밖에 안 남았어!”


100km라니! 첫 며칠은 표지판에 적힌 800이라는 숫자를 보고 ‘언제 저걸 다 가지’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나흘정도만 더 걸으면 끝나는 거리였다. 지쳐가던 중 지금까지의 걸음이 결실을 향해간다는 것이 확 체감되며 다시 힘이 샘솟았다.


기념비적인 100km 화살표


도착한 알베르게는 규모가 꽤 컸다. 건물의 생김새는 아침에 떠나온 오두막집과 비슷했지만 그걸 세 배 가량 키워놓은 창고 같은 모양새였다. 널찍한 홀 같은 공간에 늘어선 수많은 이층 침대 중 하나에 각자 짐을 풀어놓고 샤워실로 달려갔다. 한바탕 씻은 후 상쾌한 기분으로 복도로 나왔는데 입구 쪽 바닥에 누군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 옆에는 배낭과 함께 통기타 가방이 뒹굴고 있었다. 종종 기타를 지고 걷는 순례자에 대한 소문을 듣곤 했는데, 이 사람이 그 주인공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땀범벅이 된 얼굴에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큼직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해냈어! 난 대단해!”


뭔 소린가 싶어 주변을 돌아봤는데 입구에 또 다른 훤칠한 남자가 비슷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짚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바닥의 그 사람처럼 요란스럽진 않았지만 빨갛게 물든 얼굴은 마찬가지로 흥분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한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한나! 진짜 왔구나!”

“응. 여기 앤디와 제프리가 힘을 내줬지. 이제 얘네랑도 다시 만났고, 너랑도 안 헤어져도 돼!”

“진짜 이분들이 60km를 걸은 거야..?”


그 말에 답하듯 바닥에 뻗어있던 기타 가이, 제프리가 외쳤다.


“오늘 난 한계를 넘었어! 저 기타까지 메고 60km를 걸었다고! 이게 되다니!!!”


하긴. 그냥 걸어도 힘들 거리를 배낭에 기타까지 메고 걸어내는 건 대단한 일이 맞다. 길을 막고 누워있는 제프리를 향해 눈총을 보내던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말 없이 그를 살포시 피해 지나갔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알베르게 옆 피자 가게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샤워를 마친 한나와 두 친구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며 가게로 들어섰다. 얼마 후 창밖을 지나던 올리비에까지 불러들여 다섯 명이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제프리, 앤디와는 대화를 처음 해봤지만 워낙 순례길 사회가 좁기도 했고 사람이 얼마 없는 북쪽길을 걸었다는 공통점에 금세 친해졌다. 주문한 피자가 나오자마자 제프리, 앤디와 나는 피자에 타바스코 소스를 탈탈 뿌려댔는데 그 모습을 본 한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으, 보기만 해도 맵잖아. 왜 그렇게 많이 뿌리는 거야?”

“응? 이게 맵다고? 이거 그냥 풍미를 돋우려고 뿌리는 거야!”


한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넘어갔다. 각자 배낭에 항상 넣어 다니는 음식들이 있었는데, 한나는 코코아가루와 설탕, 바나나와 오트밀을 섞어 매일 아침에 먹는다고 했다.


“엥 그게 도대체 무슨 맛이야?”

“생각보다 엄청 맛있어! 너도 내일 아침에 먹어봐!”


난 평소 곁눈질로 보아온 한나의 오트밀 죽을 떠올리고는 ‘난 항상 먹던 또르띠야 파타타가 좋다’고 에둘러 답했다. 오트밀을 처음 봤던 당시의 나에게는 선뜻 다가가기 힘든 비주얼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입맛만큼 각자의 선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한나는 두 친구에게 오늘 정한 선을 넘어 자신과 함께 가달라고 청했고, 친구들은 기꺼이 그 선을 넘어주었다.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는 부족해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한나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앤디와 제프리, 한나는 늦게 도착해서 알베르게 본관에서는 남은 침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스트가 특별히 별관을 열어줬는데 그곳이 너무 좋았다. 딱 8인분 침대가 놓여 있는 방은 널찍하고 쾌적했다. 심지어 가운데에는 이층 침대 두 개가 딱 붙어 있었는데, 1층과 2층을 쓰는 사람 모두 킹사이즈 침대에서 자는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그 별관을 배정받은 사람이 그 셋뿐이라고 해서 나와 올리비에도 짐을 빼서 그곳으로 옮겼다. 익숙한 친구들과 새로운 친구들. 오롯이 그들과 공유하는 아늑한 공간에 누워 침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 오전과 오후와 밤에 함께하는 사람이 또 다르다. 이런 역동성이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우리끼리의 하룻밤 아지트


다음날 아침, 수다를 떠느라 늦게 잠들기도 했고, 분리된 공간이라 방해도 없어서인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올리비에는 일찌감치 떠났는지 그의 침대에는 흐트러진 시트뿐이었다. 전날 고생한 앤디와 제프리는 아직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아래쪽 침대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침낭에 파묻혀 있는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웃으며 손인사를 하면서도 전혀 일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 자세여서 나도 살짝 웃고는 그냥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느릿느릿 준비를 모두 마치니 10시 반이 되어있었다. 나는 어제처럼 자연스럽게 알베르게 앞 테이블에 앉아서 다른 친구들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이미 10km 넘게 걷고 있을 시간대였지만 친구들의 느긋함에 동화된 것인지 조급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오랜만에 휴일을 맞은 고3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왠지 낯선 나른함을 느끼며 말했다.


“나 순례길에서 이렇게까지 늦잠 자고 늦게 출발한 건 처음이야.”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프리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야. 한나 아니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걸.”


음 역시 다들 한나한테 느긋함이 옮은 게 분명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항상 그 애가 천천히 걸으며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으니까. 어쩌다 그런 생활 속에 들어서있는 내 모습에 잔잔한 만족감을 느끼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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