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간극 (間隙)

산티아고 북쪽길 | Lavacolla

by 이끼레몬소르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18



이른 새벽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했다.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이런 길을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한낮의 열기에 데워진 아스팔트 위에서는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도로 양 옆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지만 평온함은 느낄 수 없었다. 집채만 한 화물트럭부터 온갖 차들이 고작 몇십 센티 곁을 쌩쌩 지나쳐 달리는 통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여 온다. 언젠가 지나쳤던 자전거로 순례를 하다 목숨을 잃은 이를 기리는 조각상이 문득 뇌리에 스쳐간다. 버젓한 인도도 없는 이 좁은 왕복 일 차선 도로에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은 아마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편할 것이다. 괜히 표정을 알 수 없는 차 안 운전자들의 눈치가 보여 길 끄트머리 도랑 쪽으로 걸음을 더 바짝 붙이며 속으로 변명을 해본다. 내가 일부러 스릴을 즐기러 이런 길로 걸어 들어온 게 아니라고. 그저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왔을 뿐이니 이해해 달라고.


평소였다면 앞뒤로 사람의 그림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반겼겠지만 오늘의 아스팔트길은 너무 길었다. 하지만 찻길이 끝나고 아기자기한 길에 들어서며 오늘의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나처럼 커다란 배낭에 가리비를 달고 걷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북쪽길을 걷는 동안은 거의 볼 수 없던 인파가 길을 메우고 있었다. 드디어 프랑스길과 합쳐지는 구간에 들어선 것이다. 길 자체는 크게 바뀐 게 없지만 분위기는 한결 달랐다. 북쪽길이 바다의 차가움을 한 움큼 머금고 있었다면 프랑스길은 뭔가 따땃하고 구수한 황톳빛이 느껴졌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처음 보는 얼굴들 뿐이었다.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여기저기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어깨를 맞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있자니 적잖이 헛헛했다. 같이 다닐 때는 종종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마지막이 다가올 때 혼자가 되니 아는 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다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익숙함도 곳곳에 있었다. 프랑스길에는 소문대로 한국인들이 많았다. 북쪽길을 걷는 30여 일 동안 내가 만난 동양인들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최근 2주 동안은 만나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한국어가 꽤 자주 들려왔다. 고작 3주 동안 한국어를 전혀 듣지 못했을 뿐인데도 귓가에 들리는 발음이 생경했다. 혼자 멀뚱멀뚱 앉아있는 내 모습이 눈에 밟혔는지 어느 중년의 한국인 부부가 나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권했다. 북쪽길에서는 올리비에나 카렌 같은 어르신(?)들이랑도 격의 없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는데 한국어를 쓰는 순간 원래의 유교걸 모드로 단번에 되돌아왔다. 부부는 친척 어른들처럼 잘 챙겨주시고 대화도 잘 이끌어 주셨지만 경직되고 뻔한 대화 주제와 세대 차이가 주는 특유의 거리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부지불식간에 돌아가야 할 일상이 훅 끼어든 느낌이었다. 그동안의 모든 일들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돼버린 것일까. 친구들과 함께 했던 며칠 전마저도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출발한 이틀 전의 오후, 한나와 제프리, 앤디와 나는 일말의 조급함 없이 여유를 즐기며 걸었다. 숲 속 바에 들러 요거트와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길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간식을 먹기도 했다. 가는 중 쉬고 있던 올리비에를 발견해서 길바닥에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제프리의 기타 연주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앤디의 요가 동작을 따라 했다. 길목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과 인사를 하다 그 집 정원에 자란 산딸기를 따먹기도 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알베르게에 나 혼자 남겨져 있었다. 전날 함께 걸었던 친구들은 물론 다른 순례자들도 대부분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마쳐가는 중이었다. 다들 서양인 친구들이어서 꽤 개인주의적인 기질이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끝까지 함께 할 일행이라고 믿고 있던지라 꽤 배신감이 컸다. 하필 그 친구들과는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아서 어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심란한 기분으로 흐트러진 채 텅 비어있는 침대들을 바라보다 마지막 팀이 슬슬 나갈 낌새가 보여 나도 허둥지둥 짐을 싸들고 일어섰다. 가뜩이나 처량한데 아무도 남지 않은 알베르게에서 혼자 나가기가 싫어서 남은 사람들이 출발해 버리기 전에 후다닥 길을 나서버렸다. 독특한 무늬의 암석들과 뾰족한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울타리도 감탄했던 어제와 달리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저 아침의 뒤숭숭한 기분만이 이어졌다. 친구들이 말도 없이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 이유에 대해 온갖 추측을 하며 스스로를 더 비참함 속으로 계속 밀어 넣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주변 풍경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몰랐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커브길이 이어지는 산길 도로에 접어들어 있었다.


비교적 늦게 출발한 탓인지 걷는 내내 앞뒤로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다니는 차들도 없어 고요했다. 잎새에 산들바람이 부딪치는 차르르 소리마저 생생히 들려왔다. 그 틈새로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위화감을 주는 생경한 소리였다. 아스팔트에 무언가 부딪치며 나는 듯 타닥타닥하는 소리였는데, 그 수가 꽤 많은 것 같았다. 사람의 발소리라기엔 가벼웠고, 빨랐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정면이었다. 멈춰 서서 지그시 정면을 바라보자 곧 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에서 길이 끝나는 선 너머에서 실루엣이 머리부터 서서히 올라왔다. 개들이었다. 그것도 늑대를 닮은 모습을 한 거대한 개들이 다섯 마리나 모여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개를 중심으로 양옆에 두 마리씩 사선을 이룬 화살표 대형을 갖춰 질서 정연하면서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난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도망을 가기에는 늦었고, 길을 벗어나면 낭떠러지였다. 그저 말뚝을 박아놓은 듯 가만히 서서 개들이 나를 발견하지 않기를,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었다. 개들이 가까워질수록 현실과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개들의 걸음걸이에 온 신경이 다 쏠렸다. 다행히 개들은 내게 용무가 없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내려갔다. 개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간사하게도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아침부터 날 짓누르던 어두운 기운이 싹 걷혔다. 그래, 친구들은 그냥 먼저 가고 싶어서 떠난 것이다. 그들이 당연히 날 기다릴 거라고 믿었던 건 그냥 내 바람이었을 뿐, 그들이 그럴 의무가 있거나 약속을 했던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뜬금없이 나타나 날 곤두세웠던 야생 개들이 내 쓸데없는 걱정과 억측을 낚아채어 가버린 것 같다.


늦은 오전 어떤 바 앞에서 우연히 제프리를 마주쳤다. 그는 엄청 반가워하며 나에게 팔 전체를 흔들며 인사했는데 그 모습에는 조금 안심도 되었다. 내심 친구들이 내가 불편해서 그냥 두고 떠났나 생각도 해봤지만 그의 태도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프리는 새벽 네 시에 눈이 떠져서 그 길로 혼자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앤디와 한나, 올리비에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고 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리듬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잠시나마 배신감을 느꼈던 게 왠지 유치하게 느껴져 부끄러웠다.


한낮의 뙤약볕에 걷는 게 점차 버거워질 때쯤 제프리가 그늘막에 모여 앉아 쉬는 순례자들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제프리를 따라 그들의 곁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곁에는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엎드려 있었는데, 사냥개임이 자명해 보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낯선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와도 경계하거나 짖지 않고 얌전했다. 일행 중 한 명은 개의 등에 한쪽 팔을 올린 채 옆구리를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소파에 기댄 듯 편해 보였다. 유럽에 오면서 유독 큰 개들을 많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겁이 좀 났지만 모두 훈련을 잘 받은 개들이라 그런지 말도 잘 듣고 순해서 점차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50km 남짓으로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어서 언제 그곳에 도착할 계획인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제프리는 자신의 기타를 잠시 보더니 말했다.


“난 그냥 오늘 바로 갈지 고민 중이야. 기타렐레를 치는 내 친구가 거기 있거든. 걔의 연주와 노래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

“앗, 혹시 그거 베로니카야?”


내가 묻자 제프리는 살짝 커진 눈으로 그렇다고 했다.


“너도 걔를 알아?”

“응. 리바데오에서 같이 다녔어. 근데 노래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그렇게 잘해?”


제프리의 눈빛이 사뭇 깊어졌다.


“황홀해. 내가 들은 최고의 노래였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궁금해지는데. 그때 개에 기대어있던 친구가 말했다.


“근데 여기서 산티아고 가려면 50km 더 가야 돼. 지금 출발해도 밤에 도착할걸?”


그 말에 제프리의 어깨가 쫙 펴졌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며칠 전 60km를 넘게 걸었던 이야기를 꺼내며 50km 더 걷는 정도는 자신 있다고 말했다. 친구들의 눈이 경악으로 켜졌다.


“60km? 저 기타까지 메고?”

“너 미쳤구나.”


혀를 내두르며 말한 친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Muy loco...”


앉아서 몇 번이고 단번에 끝낼지 말지를 고민하던 제프리는 일단 빨리 출발해야겠다며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까지는 쉬엄쉬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제프리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만약 제프리가 산티아고로 바로 간다면 이걸로 마지막일 테지. 짧은 시간 동안 친해졌던 스페인 친구들과 개도 손을 흔들며 갈 길을 가버렸고, 그대로 하루가 더 지났다.




침대에 누워서 폰을 켰다. 내일은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다. 해가 높아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새벽 4시 반에 알람을 맞추었다. 보름달이 창 밖에 휘영청 떠있었다. 흰 달이 가로등처럼 밝았다. 마지막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친구들 몇 명은 이곳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갤러리 앱을 열어 그간 쌓인 사진들을 엄지로 훑었다. 제프리는 진짜로 어제 산티아고로 가서 베로니카를 만났을까? 한나와 앤디는, 올리비에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만나지 못한 달리아와 앤은? 프리미티보 길로 빠졌던 마틴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친구들을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마지막은 오늘처럼 군중 속에서 씁쓸함을 삼키는 날이 될까.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잠에 들어야 했지만 길에서 스쳤던 친구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텅 빈, 캄캄한 밤하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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