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까미노 매직

산티아고 북쪽길 | Santiago de Compostela

by 이끼레몬소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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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15분. 알람으로 맞춰놓은 진동소리에 잠이 깼다. 나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알람음이 간헐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그 소리에 침낭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긴 스페인 북부도 아직 해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새벽이었다. 침낭정리부터 신발끈 묶기까지의 준비 과정을 마치고 나니 약 5분이 흘러 있었다. 첫날 30분은 족히 넘게 걸렸던 일들이 스스로도 어떻게 했는지 완전히 의식하지 못할 만큼 습관처럼 몸에 뱄다. 이런 채비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완전히 실감하기도 전에 캄캄한 길 위에 올랐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지막 10km는 어수선했지만 고요했다. 끝이 코앞이라는 설렘이 조급함이 되어 모두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시에 여정이 끝나간다는 심란함이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한 듯했다. 나도 평소보다 빨라진 속도를 느끼며 음악도 없이 조용히 걸었다. 중간에 바에 들러 아침을 먹고 쉰 후에도 어두웠던 하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표지판이 나타남과 동시에 환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침을 준비하는 주민들과 표지판을 보고 점점 더 빨리 걷는 순례자들, 그런 이들을 신기한 듯 지켜보는 관광객들까지 한데 섞여 걸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길을 따라가다 보니 별안간 탁 트인 광장이 나왔다. 고풍스러운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장은 고요했지만 곳곳에서 트래킹 복장 그대로 누워있거나 배낭을 곁에 두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뒤를 돌아보니 사진으로 숱하게 봤던, 하지만 처음으로 직접 마주하는 웅대한 건축물이 우뚝 서 있었다. 순례자들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가벼운 아침 공기가 광장을 맴돌다 성당의 장엄함에 스며드는 듯 적막함 속에서 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게 끝이라고?’


도착하면 어떤 기분일까 수십 번 상상했지만 막상 도달하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허무할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열심히 걸어 도착한 곳엔 한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멋진 중세 건축물과 그 앞에 덩그러니 선, 커다란 배낭을 짊어져 굽은 등으로 초라히 서있는 나뿐이었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이제부터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헤이!! 도착했구나!”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가로질러 난데없이 귓가로 꽂히는 선명한 목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돌리니 제프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와 제프리! 언제 온 거야?”

“난 어제 도착했어. 오늘은 혹시나 하고 와봤는데 오길 잘했네.”


허무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대신 반가움이 가득 찼다. 여전히 뭘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하루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프리가 말해준 대로 사무실로 가서 완주 인증서를 발급받고 광장으로 돌아갔더니 제프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깜짝 놀랐다.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은 마틴이었다. 그는 놀란 표정의 날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말했지. 우린 같은 날에 도착할 거라고. 그럴 것 같았어.”


마틴은 나와 같은 날 출발했다가 갈림길 직전에 헤어졌던, 헤어지며 마지막 날의 재회를 기약했던 친구였다. 서로 다른 길을 걷던 2주 동안 소식을 전혀 몰랐지만 우연이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길의 끝으로 인도해 준 것이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게 가능하다니.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프리, 마틴과 함께 광장을 둘러싼 기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노라니 북쪽길의 끝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모조리 만날 수 있었다. 해가 높이 뜰 무렵 한나와 앤디가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합류했고, 오두막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롭과 율리아도 그들과 함께 나타났다. 혼자 서서 막막했던 시간은 대책은 없지만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시간으로 흘렀다.

우리는 둥글게 앉아 각자가 보낸 시간과 도착한 심정, 그리고 지금 보이는 풍경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재잘거리다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일어났다. 그때 제프리가 자신의 배낭 옆에 세워져 있던 나무 지팡이를 집었다. 그 또한 왠지 익숙한 물건이었다.


“너 시네 기억해? 중간에 만났다며? 걔가 이걸 나 주면서 달려있던 꽃은 너 만나면 주라고 했어. 음, 근데 꽃은 너무 말라서 그냥 떨어져 버렸나 봐.”


단번에 피녜라에서 만난 시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명한 붉은 나리꽃과 세심하게 사슴벌레를 도와주던 손길까지.


“와 진짜 신기하다. 까미노 매직이란 게 진짜 있나 봐.”


마법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그냥 광장에 나와봤다던 제프리처럼 이른 아침 어떤 예측도 없이 광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눈에 익은 형광 초록빛 배낭이 단번에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올리비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이~”


그 순간 올리비에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왔다. 오래전 헤어진 달리아였다!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에 우리는 몇 마디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다가 겨우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다는 말을 나누었다. 함께 걷기 시작하더라도 10분이 지나면 속도가 어긋나고, 그것이 쌓이면 며칠의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마지막 지점에서 머문 하루가 그 간극을 메꿔주었다. 방방 뛰며 재회를 하는 사이에 어제 만났던 친구들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마지막에 걸어오는 한나는 큼직한 자전거와 함께였다. 땅의 끝, 묵시아와 피니스테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한나도 함께 어니언 그룹에 있었던 달리아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비로소 여정이 완성되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는 마틴, 달리아, 한나, 올리비에, 롭, 율리아, 제프리, 앤디, 그리고 달리아의 새로운 친구들 리아와 함께 산티아고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완주 인증서보다도 그 사진 한 장이 내 여정을 더 선명히 증명해 주는 증서로 여겨졌다. 사진을 찍은 직후 한나는 이제 출발할 때라며 친구들과 차례로 인사와 포옹을 나누었다.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한나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너와 헤어졌다 만난 모든 순간이, 나에겐 최고의 순간들 중 하나였어. 부다페스트로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 줘.”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를 만나서 좋았어. 조심히 가!”


나와도 포옹을 나눈 후 한나는 한 손으로 자전거를 끌며 우리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자전거에 올라 쌩 하고 멀어져 갔다. 남은 우리는 내일이 더 있을 것처럼, 혹은 이제 모든 게 다 끝난 것처럼 놀았다. 낮부터 상그리아를 마시고는 몽롱해진 채로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자다가 일어나서 정처 없이 거리를 거닐다 핸드팬을 연주하는 사람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노래를 감상했다. 밤에는 롭의 현지인 친구 개리의 아파트에 놀러 가서 대화를 나누다가 작은 클럽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는 내일 다시 볼 것처럼 평범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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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를 떠나는 그다음 날은 한적한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방향은 순례자들의 경로와는 어긋나있어 순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어제까지의 일은 다시 꿈처럼 느껴졌고 나는 다시 평범한 배낭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보니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점점 도시가 멀어져 가고 버스는 차도 양옆에 가드레일이 쳐진 도로로 들어섰다. 순간 정체된 건지 버스가 속도를 늦췄다. 그래서 가드레일 너머 풀숲에 난 오솔길로 배낭에 가리비를 단 순례자 네다섯 명이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모습이 잘 보였다. 포르투갈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들의 표정과 느린 속도가. 그 찬란한 시간이 모두 투명한 창 너머로 또렷이 전해졌다. 하지만 투명하기만 할 뿐 창은 벽이었다. 난 이제 그저 관찰자일 뿐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었다. 그때 정체가 풀렸는지 버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순례자들과 나는 서로 반대방향을 향해 멀어져 버렸다. 아무런 접점도 없고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의 여정을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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