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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다윤 Jun 01. 2020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내역서 : 동대문에서 맥주 두캔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맥주 두캔 6천원

오늘의 시1발비용 지출내역서 :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맥주 두 캔 6000₩     




동대문성곽공원에서 조촐한 회식을 열었다. 메뉴는 맥주한캔과 만두.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갔던 인턴이었다. 그것도 관심 있던 업종에서 손에 꼽히는 꿈의 기업의 인턴으로. 막내의 적당한 순진함과 패기로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을 맞는 주말드라마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의 울타리를 막 벗어나서 현실을 마주하고서야 장르가 극사실주의 동물다큐멘터리인 줄을 깨달았다. 나는 무방비상태였고, 심지어 맛까지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어뜯으면 젊음의 육즙이 줄줄 새어 나오는 맛이 일품인 먹잇감.      


 순진한 초식동물은 겁도 없이 노련한 맹수들에게 ‘비즈니스’를 논하러 낯선 곳의 문을 두드렸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해 냉담한 반응이 되돌아오는 것은 실망스러웠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면 성과를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꼬거나 웃음거리로 삼는 이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감정노동의 스트레스를 내게 풀기도 했다. 더러는 뒷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희망차게 사회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으나 얼마 못가서 맥이 빠지고야 말았다.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기를 희망하며 몇 주를 보내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나만을 위한 회식 자리를 열었다.      


회식장소의 조건은 3가지.      

첫째. 지하철역에서 가까울 것.

둘째. 가격이 몹시 저렴할 것.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치가 있고 낭만적일 것.     


 나는 생각보다 손쉽게 동대문 성곽공원을 찾아냈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도보 10분이면 충분했고, 입장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인지문과 고층 빌딩이 한눈에 보이는 멋진 야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퇴근하자마자 동대문으로 달려가 인근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메리어트 호텔, 평화시장, 흥인지문, 두산타워같이 섞이기 힘들 것 같은 재료들이 꽤나 사이좋게 자리 잡은 모습이 볼만했다. 서울에서만 20년 넘게 살았지만, 따로 시간을 내서 자리를 잡고 지켜본 서울의 야경은 매우 낯설기만 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겨울옷을 1년 만에 꺼내입다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만 원짜리를 여러 장 찾은 기분이랄까.      


 처음에는 풍경이 들어왔고, 맥주 한 캔을 비울 때쯤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야근으로 채워진 빌딩 창문사이로 새어나오는 불빛 아래 한가하게 벤치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내가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이들로 가득 찬 도로를 봤다. 모두 열심히 버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사람들도 참고 버티다 못해 가끔은 하소연하기도 고, 술을 마시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좀 견딜만해졌다.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다음 한 캔까지 비우고 나서 집에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감히 오늘 힐링을 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내일 일어나서 출근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 딱 그정도의 응급처치는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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