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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다윤 Jun 01. 2020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 내역서 : 만년필

만년필 8만원/28만원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 내역서 만년필  80,000₩/280,000₩        




  오른쪽부터 워터맨, 파커, 세일러 사의 만년필들, 잉크를 찍어쓰는 딥펜. 가격은 오른쪽부터 28만원, 8만원, 4만원, 8천원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다그치고 닦달하는 세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더 빨리’는 거의 한국인의 정체성에 가깝다. 기업들은 ‘더 빨리’가 없다면 밥그릇을 지키기 어렵다고 믿는지, 밥그릇 싸움 꿈나무들이 모인 취업 시장에서도 역시나 ‘더 빨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한된 시간에 더 빨리 문제를 풀어야 하는 NCS나 인적성 검사의 장벽을 뚫어야 면접까지 갈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문제당 1분 남짓한 시간에 소금물의 농도나 입체도형을 270° 회전한 모습을 구해야 한다. 문제를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풀지 못하면 거기서 끝이다.     


 설령 면접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출근했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지 못한다면, 실무경험이 있는 중고신입 경쟁자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어딜 가나 더 빨리, 지금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하면 설 자리가 흔들리는 현실이다. 어디 취업뿐인가. 수능이든 승진이든 주어진 시간 안에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해내야 올라갈 수 있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유일하게 아는 단어가 ‘빨리빨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은 빨라야 살아남는 나라다. 그렇게 서두르는 나라에서 나 같은 거북이는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20살의 나는 수능시험에서 시간의 독촉을 이기지 못해 재수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1년늦게 출발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은 급했지만, 서두른다고 생각과 행동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문제를 푸는데 걸리는 시간, 자는 시간,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 줄여야 하는 시간은 넘쳐났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뭔가를 해볼 시간은 좀체 주어지지 않았다. 더 빨리, 가급적 남들보다 월등히 빨리 뛰기를 권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의 미학에 심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렸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나는 큰맘 먹고 파커 만년필을 한 자루 샀다. 더 빨리,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때면 만년필을 꺼냈다. 정성스럽게 먹을 가는 선비의 심정으로 차분히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고 나면 내 고유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급한 마음을 진정시켜 내 몸을 적절한 템포에 맞추다 보면, 최소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고속도는 낼 수 있었다.      


 만년필은 천천히 기다려줘야 한다. 처음 만년필을 사면, 내 손에 길들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년필을 처음 써보는 사람들은 잉크를 넣는 즉시 부드러운 필기감을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일정기간동안은 종이를 긁는 듯한 거친 질감과 생각보다 부드럽지 않은 잉크흐름을 감내해야 한다. 만년필은 내 필기습관과 자세에 맞춰 길들여지는 순간부터 진가를 발휘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금방 쓰다 버리는 볼펜처럼 꾹꾹 눌러 쓰지 않아도 물 흐르듯한 필기감을 얻으려면 꽤나 오랜 시간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데스밸리를 통과했다면, 그때부터 사용자들은 만년필에 애착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 번만 존재감을 꽃피웠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겨도 만년필을 외면하거나 방치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그 몇가지 문제가 상당히 귀찮은 편이다. 잉크가 굳으면 미온수에 담가줘야하고, 닙(펜촉)이 벌어졌다면 수리를 맡겨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여간 번거로운게 아니다. 성미가 까다로운 아기랑 함께 부대끼는 느낌으로 보관하고 관리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수년째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수고로움을 상회하는 만년필의 매력에 대한 반증이다.


 내가 특별히 만년필을 구매하고 번거로움을 감수했던 것은 만년필 특유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재수생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당시 스스로가 찬밥 취급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남들보다 대입수학능력이 떨어지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기대치도 낮은 찬밥. 그 당시의 스스로를 비추던 자화상이었다. 지금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믿고 기다려 준다면 무언가 보여주는 만년필처럼 나도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마 그래서 천천히 기다려줘야 하는 만년필에 애착이 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회사에서 신입을 뽑는데 경력이나 직무지식을 물어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기업들은 한참 전부터 교육 없이도 써먹을 수 있는 신입을 선호하는 추세다. 어디 기업뿐인가 과학계도 마찬가지다. 노벨상 수상 시즌마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라는 내용의 보도를 자주 접한다. 당장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가 저조하며,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는 연구비 지원 등 그놈의 ‘빨리빨리.’가 문제다.     


 내가 만년필을 쓴다고 ‘남들보다 더 빨리’를 선호하는 대한민국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천천히 여유를 가지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다. 좀 더 기다리고, 갈고닦는다면 진가를 발휘하는 만년필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보게 되었다. 손 닿는 거리에 위안을 주는 애장품이 있다는 사실은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된다. 변변찮은 상차림에 달걀 후라이라도 하나 얹어주면 식탁이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 듯이, 애장품이 돈을 몇억씩 가져다주지는 않아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준다. 그렇게 달걀 후라이 하나 얹고, 스팸이라도 구워 구색은 갖춘 삶의 상차림을 완성시키다 보면, 소금물 문제 조금 늦게 풀더라도 나는 좋은사림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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