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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다윤 Oct 03. 2023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내역서: 만화책 은수저

은수저


 비행기를 탔다고 해서 하늘을 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스스로 하늘을 날 수 있다기에는 구름을 뚫고 가는 쇳덩이의 강인함도 내것이 아니었고, 지구 반바퀴는 거뜬한 엔진의 동력도 내가 이뤄낸 적 없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요행으로 공짜 티켓하나 얻었던 것 외에는 없었다. 나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보안검색과 출국심사를 통과해야했다지만, 파도에 쓸려 제자리로 제자리로 떠밀려오는 보트피플의 수고로운 삶에 견줄수 있을까. '나는 편히 하늘을 건널 자격이 있을까.' 하고 호강에 겨운 생각을 하는 동안 저 밑에서 누군가는 전쟁같은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20살에 첫 실패를 맛본 재수생은 휴먼르포 동행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린아이의 지능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김00씨가 가족들과 동태전을 해먹을 생각에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2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내 알량한 지성이 김00씨의 것이었다면, 그는 내 인생보다 가치있는 삶을 살아내었을까.

둘째. 갖가지 지원을 받고도 삶에 허덕이는 나는 가진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첫번째 의문은 '사람일은 아무도 모른다.'며 뻔뻔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두번째 의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 자신이 없었다. 북한의 꽃제비, 연필대신 총을 잡은 중동의 소년병,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동남아의 어린 아이들. 그들은 헤엄을 치며 파도를 뚫고 가는 중이고, 나는 비행기에 앉아 바다를 건넌다. 개중에 몇은 뗏목이라도 만들어 바다를 일주하기도 하겠지만, 파도가 미치지 못하는 하늘길에 편히 누워 바다를 건너는 내 호사스러운 처지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을 자격이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창밖을 내려다 보면 모든 것이 작아보인다. 이 작은 세상에서 아웅다웅 버티는 삶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돌리고 또 돌려내는 삶들을 우습게 본 것은 아닐런지. 내가 졸면서 대치동 일타강사의 강의를 들을 동안 어딘가에서는 내 또래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었을 것이다. 군 입대를 앞두고 술을 퍼마시며 무료해하던 시간에, 누군가는 미사일 포격과 총격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빌어먹지는 않을 수 있는 처지를 누릴 자격이 있을까.'를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수는 없었다. 그 날 이후로 그저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다기에는 과한 죄책감이 몇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군대를 다녀오고,  '강철의 연금술사'로 유명한 아라카와 히로무가 그린 '은수저'라는 만화책을 알게되었다. 도시의 경쟁에 지친 주인공이 농고에 입학해 농촌생활을 하며 삶과 노동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퍽 인상깊었다. 보통 만화책 주인공들은 세상을 구하거나, 규모가 상당한 일에 휘말려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은수저의 주인공은 딱 1인분만큼의 규모의 삶을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 은수저를 읽고나서 '내 깜냥만큼 세상을 지고가다가 후대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로 했다. 


"개중에는 아이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하나, 또 하나 은식기를 선물하는 부모도 있지요."
(중략)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훌룡한 은식기 세트가 완성되는 겁니다.아이는 그 은식기 세트를 밑천 삼아 떠나서 새로운 가정과 사회를 꾸려가죠."
(중략)
"자기가 하는 일이 마치 소비사회의 출발점이라고 착각하게 되기 쉬운데... 그일을 할때도 도구나 노하우가 필요하며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쌓아온 역사입니다."
(중략)
"이곳에서 경험한 일들은 선배들이 하나둘씩 쌓아올린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뜻이에요. 꿈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평등하게. 은수저의 마음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세요. 다만, 은은 닦지 않으면 금세 변색한답니다."

 - 은수저 96화 中 -


 수십만년 동안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여럿의 힘을 빌려 발전해왔다. 건축, 인쇄, 기계, 전기, 인터넷 그 어디에도 나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세상은 항상 진보하고 발전해왔다지만, 시대를 뒤흔들만한 파격적인 발상이 아니라면 좀체 주목받기 힘든것이 세상 이치다. 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담론에서 눈에 띄지않게 살다가 곧 없어질 한 명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저 한명만큼의 부담감만 가지기로 했다. 


 드라마 미생에 아들뻘인 장그래에게 허리숙여 인사하는 하청업체 임원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계약직 사원에게 굽신대는 임원이 안되보였다는 장그래는 오차장에게 '누가 누굴 동정하냐'며 혼쭐이 난다. 이 자리를 빌어 20살에 본 다큐에 출연했던 김00씨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런 맘을 전한다. 나는 한낱 미물임을 받아들이기에 부의 재분배, 정의, 공정 같은 블록버스터급 주제들은 딱 1인분만 떼와서 지고 가기로 했다. 오버하지 않고 1인분만큼 사는 것도 중요한 삶의 덕목이라 믿는다. 내가 부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비행기를 타건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건 간에 지구는 계속해서 돌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돌았고, 오늘도 돌고, 내일도 돌것이다. 오늘도 할 수 있는 만큼 나름 열심히 살았고, 내일도 아마 오늘과 비슷하게(약간은 다르겠지만) 딱 1인분의 무게만큼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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