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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다윤 Sep 08. 2020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내역:퓰리처상 사진전. 그리고 밥.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나는 물을 부었습니다."
(네이팜탄에 옷이 불타 알몸으로 도망쳐야 했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사진 찍은 이후)
닉 우트 (1973년 퓰리처상 사진부문 수상)
퓰리처상 사진전 팸플릿 내용

 나는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고 나서 뻔뻔하게 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세상은 가혹했지만, 내 밥그릇 싸움 또한 치열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양분을 섭취해야 했다. 퓰리처상 사진전 관람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퓰리처상 사진부문은 1942년 이후로 한국전쟁, 베트남전, 9.11 테러, 아이티 재해에 이르기까지 근현대를 총망라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하는 가족들의 모습,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마지막 모습 같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을 담은 사진이 수상한 경우가 80% 이상이다. 시체가 널브러진 난민캠프의 거리, 끊어진 한강 다리 구조물을 건너는 6.25 피난민, 집단처형당하는 모습. 시상식 한 달 만에 죄책감으로 자살한 사진작가도 있을 정도로 촬영 현장은 처절했다.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고 나서 나는 기념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단돈 몇 푼이 없어 누군가가 죽어가는 현실이다. 예전에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서 몇 초에 1명이 아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교사님이 숫자를 몇까지 셋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하나부터 다섯 언저리까지 천천히 세고 내 또래 아이가 죽었다고 했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기억은 난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들어도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 겨를도 없다. 북극곰이 굶어 죽고, 빙하가 녹아내리는 지구온난화 캠페인도 이제 슬슬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약발이 떨어지는 것처럼 더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에 들기도 힘든 현실이다. 살인은 기본이고 소년, 소녀를 당나귀와 수간시켜야 했어야 할 만큼 자극에 둔감했던 콜로세움의 로마 시민들이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콜로세움의 모래바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관중석에서 무심하게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나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십시일반 정신을 발휘하기에는 내 밥상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일단 밥 한 그릇만 있으면 생명유지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밥상에 밥이 있으면 나물반찬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나물이 보이면 고기반찬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것이 사람이다. 어디 고기반찬뿐인가. 결혼자금을 한 접시 올리고 나면, 전세자금도 한 접시 올려야 하고, 자녀 학자금에 노후자금까지 얹으려면 다음 생애는 되어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호화로운 인생을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춘 삶을 살고 싶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즘은 적당히 구색을 맞춘 삶을 사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세상은 정신없이 요동치는 밥그릇에 주목하지 않으면 내 몫을 빼앗기는 야바위의 현장이다. 잠시라도 밥그릇에서 눈을 떼었다가 다시 밥그릇에 눈길을 돌려보면 어느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무조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을 믿고 자랐던 편이다. 살다 보니 '이것 하나만 하면 된다.'라는 말처럼 무식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 없더라. 눈뜨고 코베이는 세상은 아니지만, 잠시 한눈팔다가 밥그릇 싸움에서 밀리는 일은 얼마든지 벌어지는 세상이다.


 직방, 다방, 한방, 안방 등 온갖 방 시리즈 카피캣이 난무하는 부동산 중개 어플 시장은 대표적인 밥그릇 싸움의 현장이다. 적당히 성과를 내는 직원은 두둑한 퇴직금을 주고 내보낸다는 넷플릭스는 이미 최고에 가까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최고를 지향하는 조직이다. 넷플릭스처럼 일인자도 노력하는 상황에서, 나는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나는 제3세계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도 없으며, 인터뷰 한 번으로 조국의 내전을 멈춘 축구선수 디디에 드로그바처럼 영향력이 있지 않다. 가장 결정적으로 내 밥그릇조차 온전하지 않은 상황이다.


 밥이 한 그릇은 있어야 타인에게 1 숟갈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콩 한쪽도 쪼개서 나눠먹는다면 그건 선행보다는 2명이 굶주리는 안타까운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마더 테레사, 슈바이처 같이 주변을 돌보시는 훌륭한 분들도 나랑 같은 세상에 살고 계시기는 하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오시는 분들을 잣대로 삼기에는 기준치가 너무 높다. 나는 수영을 할 체력이 없는 상황에서 물에 빠진 행인을 구하러 뛰어드는 사람을 현명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냉정하다고 비난받더라도 119에 전화를 거는 이상의 결단은 아마 내 삶에서는 없을 것이다.


 물에 빠진 행인을 애써 외면하고 나는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다. 그래도 위선자는 아니라며 애써 정신승리를 해본다. 내가 굶주리는 것은 괜찮아도 이웃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못하는 선한 사람들만 내게 돌은 던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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