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의 경계에 서서는 ‘감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르네 마그릿의 <백지 위임장>, 숲의 전후 세계가 그러하고, 여기 레니에의 신화의 땅, 페루의 땅끝이 그러하다. 인식에 잡히는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를 대지 않아야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신화 속에는 과학의 산물, ‘인과’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시에, 바다에, 자연의 신비에 그 설명을 유보한다.
새들은 왜 안데스 산맥 발치의 이 페루 해변으로 와 죽는 것일까? 그는 왜 세상과 절연하고 허무에 이른 삶을 이곳 해변에서 살아내고 있을까?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12)”의 그가 종착지로 선택한 곳은 왜 여기일까? 한 가지 설명이 분명 있겠지만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귀 기울이는 시와 바다와 자연은 그런 류의 설명을 하지 않으므로… 시와 바다와 자연을 닮아가는 그는 설명 따위 부질없다 생각하므로…
실존적 존재들 모두 물질화된 세상. 그가 떠나온 세상은 이러하다. “고상한 영혼 하나가 이상주의에 헌신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한 나라의 경찰을 먹여 살릴 수 있는(13)” 세상. 가마우지가 떠나온 세상은 이러하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내는 조분석으로 같은 기간 동안 사람의 일가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13)” 세상. 실존의 가치 이전에 ‘에너지원’이라는 본질을 강요하는 세상. 그런 세상.
페루의 땅끝, 그 해변은 실존을 해방한다. 그도, 가마우지도 자연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와 가마우지의 선택은 온당하다. 과학이, 세상이, 존재의 본질을 강요한다 해도, 결국 ‘자신이 결말을 내려야 하는<사랑할 때와 죽을 때; 517>’ 것은 분명 있는 것이니… 때때로 고약한 고독이 짓눌러 버린다 해도, 시와 바다와 자연이 있는 그의 신화의 세계에는 자신이 선택하여,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자아’가 있다. 이는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20)” 자아다.
페루의 그 바다,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살아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19)”이지만…
불현듯 품으로 날라든 아름다운 새, 그녀는 바다가 긴 시간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자아 준 가슴 속 체념에 ‘희망’이라는 균열을 일으킨다. 그것은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 희망의 유혹(19)”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그가, 가마우지의 생의 끝을 지켜봐 주는 그가, 여인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은, 어쩌면, 허무의 삶과 역행하는 선택이다. 그리고… 이 유혹에 대한 굴복도, 역행이다.
페루의 바닷가 그 땅끝 까페. 그는 왜 사라졌을까? 아홉 번째 파도의 유혹에 진 자신의 세속성에 환멸을 느꼈을까?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할 새를 살린 것으로 ‘영혼의 반환’이 이루어지는 성지가 변질되었기 때문일까?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 새가, 금, 다이아몬드, 에메랄드(물질주의)와 몬테비데오르 귀즈망 교수(과학)를,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살 순 없는 세상’을 자신의 신화 속에 들여놓았기 때문일까?
설명할 필요 없다. 이해할 필요 없다. 페루의 그 땅끝 해변에는 바다표범 소리, 바닷새 울음소리, 바다가 표효하는 소리가 그 답을 알려 줄 것이니... 조금 시적이고, 조금 망상적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