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슬픔은 존재감이 크다. 특히, 홀로 느끼는 슬픔의 자락은 섬세하여 잔잔한 공기의 미동에도 변주한다. 입술을 꼭 다물고 견뎌내는 눈물의 흐름은 투명하다. 그리고 탐스럽다. 페르소나로 돌아가 눈물을 닦아야겠다고 느낄 때, 내면의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현실의 절박한 뭔가가 자아로부터 떨어져 나가, 나를 응시한다. 이젠 그 존재의 눈길이 두렵지 않다.
홀로 극장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떠나간 뒤에도 투명한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마음에 찰방찰방 차오른 연민의 감정이, 동화의 감정이, 압도된 형상일지 몰랐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밖에 지켜보지 못한 그녀, 정의와 소신과 의리를 지키고자 죽음을 택한 그, 극한의 공포로 크게 뜬 눈에 감지되는 떨림. 그 미세한 떨림에 순전한 나를 묻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캄캄한 비행기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잠든 밤, 기내 블랭킷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가슴을 흠뻑 적신 물빛감정이 입 밖으로 존재를 드러낼 듯해, 힘주어 다문 치아의 끝에 슬픔의 경계를 세워 울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기내 TV속 큰 세상,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에, 자신을 연소하여 떠나는 죽음의 행로에, 눈물로 그를 벗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 최고의 카타르시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이 관객들에게 주는, ‘마음을 정화 시키는 힘’을 그때 그, 영화석에서, 비행석에서 경험했다. 당면한 문제들, 미래의 불확실성, 일의 중압감, 책임의 압박감, 양육의 불안감, 날선 칼날과 같은 그 남자의 매운 혀끝 따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 자체였던 그 문제들은 유체이탈을 하듯, 먼 거리에서 생경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보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이었다. 정화된 마음으로 대적 못할 것이 없었다.
미적 슬픔은 현실의 슬픔과는 다르다. 미적 슬픔은 마음에 엉겨 붙은 불안감, 우울, 스트레스 등을 해소 시켜주지만 현실의 슬픔은 이러한 고통들을 더욱 엉기게 만들어, 더 큰 슬픔을 안겨준다. 어떻게 다른 것인 지 실증은 못하지만, 내 가슴은 안다. 현실의 슬픔은 독 이라는 것을.
현실의 슬픔은 혼탁하다. 그 속에 나란 존재가 있다. 나란 존재가 주인공이 되어 상황을 겪어내야 한다. 필연적으로 슬픔은 ‘분노, 긴장, 우울, 절망’을 동반한다. 내 문제이기에 내 살과 피에 고착되어 있다. 혼재된 감정인 ‘분노, 긴장, 우울, 절망’등은 심장과 너무나 가깝다. 긴박감이 없는 슬픔은 감히 다가서지 못한다.
미적 슬픔은 ‘순수 슬픔’이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에,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다른 감정을 겪어내는 것은 극화된 존재이므로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순수 슬픔만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후퇴감정이기에 내면 깊숙하게 잠들어 있던 나의 슬픔은 이 순수 슬픔과 공명한다. 억압되어 있던 슬픔이 폭발하듯 자신의 소리를 낸다. 슬픈 감정이 해방된다.
세월을 살아 낸 나는 감성을 존중한다. 정신의 고양상태가 행복을 가져다 주길 믿기 때문이다. 특히 슬픔에서 오는 희열, 무엇보다 짜릿하고 매혹적이다. 비극은 늘 배고픔이고 목마름이고 향수다. 신화시절 디오니소스 제전에서부터 그래왔다. 그래서 그토록 비극을 찾아 헤맸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혼탁한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 주길 바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