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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Dec 06. 2022

휴대폰을 도둑맞았다.




휴대폰을 도둑맞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흘린 것일 수도 있다. 서울이었다면 스스로를 자책했겠지. 바로 ‘누가 훔쳐갔구나’ 했던 건 그곳이 소매치기와 집시가 넘쳐나는 유럽의 어느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자 잘 쏘다녔다. 아날로그 여행이 주는 색다름이 재밌었다. 카카오톡도 아이메시지도 없는 세상에선 공중전화가 세상과 통하는 목소리가 된다. 구글맵이 없는 길거리에선 주변 행인이 길잡이가 된다. 인터넷과의 연결은 단절되었지만 그래서 사람과 더 많이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휴대폰 없는 여행은 여러 추억을 남겼다. 특히 프랑스 본토 서쪽의 작은  -삐에르-돌레홍(Saint-Pierre-d’Oleron)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곳은 여름이 되면 프랑스인들이 휴가지로 종종 찾는다는 한적한 섬이다. 친구 플로렌스가  섬에 있는 작은 호텔의 인턴이었는데, 일이 끝나면 심심하다며 자길 보러 오라고 했다.


Come

이 한 마디가 잠든 나의 호기심에 불을 당겼다. 호스텔 공용 컴퓨터 앞에서 급하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주소와 연락처를 적은 쪽지 하나를 달랑 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1.   보르도역 —> 라로쉘역

2.  라로쉘역 앞에서 돌레홍 섬으로 가는 버스 타기

3.  x 정거장에서 내려서 y 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4.  z 정거장에서 내리기 (4시 30분 예상)

주소 xx xx  플로렌스 +33 45 67 89 01


이 모험의 최종 미션은 플로렌스와  4시30분에 z 정거장에서 만나기.

영화 ‘비포선라이즈’에서 두 주인공이 연락 없이 만나기로 약속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아날로그의 불확실성이 주는 낭만을 디지털 시대에 경험하다니, 이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장비빨 없이(=휴대폰 없이) 퀘스트를 무사히 깨보자는 도전정신도 들었다.




어떤 게임이라도 초반 퀘스트는 쉽다. 정시에 보르도역을 출발했고 정시에 라로쉘역에서 내렸다. 라로쉘은 소박하고 한가한 프랑스 시골 마을이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게 사건 터지기 딱 좋아 보였다.


일돌레홍 버스


의외로 버스는 정시에 왔다. 대신 버스 요금이 내가 가진 현금보다 1유로 높았다. 눈 앞의 버스는 돌레홍 섬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였다. 어쩐지 시작이 너무 수월하더라니.


버스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내리라고 할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길 따라 내리라고 했다. 그 분은 짐을 잔뜩 메고 쫄아 있는 어린 양을 버리고 가는 대신 역 근처 ATM으로 나를 인도했다. 오 주여!


현금을 뽑는 찰나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내 짐만 싣고 떠나진 않았겠지’ ‘놓치면 뭐 타야되지’ 잡생각을 잔뜩 메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친절한 프랑스 버스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출발 시간이 지연됐는데도 아무도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지도 않았다. 갓 블레스 똘레랑스!


x 정거장까지는 40 정도 걸렸다.  정거장은 뒤로는 밭이 있고 앞으로는 2차선 도로인 전형적인 시골 정거장이었다. 다행히 y 가는 버스의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나의 안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버스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퀘스트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버스는 늦을  있다. 하지만 30분이나 늦는  이상하다. 그리고 지나가는 버스가   대도 없는   이상하다. 휴대폰이라도 있었다면 검색이라도 해봤을 텐데   있는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필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정거장 표지판만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르겠다.




y 로 가는 버스는 오지 않는다(적어도 오늘은)는 확신이 들 때쯤, 저 멀리 내 쪽으로 오는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다. 바로 짧은 프랑스어를 총 동원했다.


“실례지만 혹시 y 로 가는 버스 정거장이 여기가 맞나요?”

(실제 : 실례지만. y. 버스. 타다. 여기?”)


“오늘 그 버스는 안 와요.”


“(당황) 그럼 y 로 가는 다른 방법이 있나요?”

(실제 : 가고싶다. y. 다른. 버스?”)


“없어요.”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더니 나를 등지고 걸어갔다. 이때부터는 진짜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프랑스 어느 시골 마을 버스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절망에 빠져 망부석처럼 서있다 돌이 되어버린 동양인 여자애.  동네에 이렇게 소문이 나도 하등 이상할  없었다.


휴대폰이 있으면 뭐 택시라도 불러 볼텐데.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아니 어디까지 걸어 가야하지? 플로렌스한테 어떻게 연락하지?‘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

아주머니가 다시 돌아왔다!  분은 나를 등지지 않았던 거다!


그치만 진짜 놀란 건 그 다음이었는데, 자기 친구가 차가 있으니 플로렌스를 만나기로 한 z 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갓 블레스 프렌치! 멝시!(Merci : 감사합니다) 멸치볶음!(Merci Beaucoup : 매우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기사회생했다.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곧이어 낡은 회색 승용차  대가 도착했다.  차는 썬팅도 없고 창문도 손잡이를 돌려 여는 옛날 차였다. 하지만  차는 물에 빠져 익사하기 일보 직전인 나를 구원해낸 노아의 방주였다.


마침내 z 도착했을  플로렌스와 약속한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친구는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가 아닌  승용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며 놀란  말할 것도 없다. 플로렌스는 아주머니와 친구분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사이 가방에서 아껴뒀던 초코파이  개를 주섬주섬 꺼내 건넸다. 그때는 그게 내가 표현할  있는 최상급의 감사 인사였다.


긴장과 불안의 무게로 뭉개진 초코파이를 드리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정석으로 퀘스트를 깬건 아니지만 어쨌든 최종 미션은 성공.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10년 뒤에도 떠들 수 있는 추억을 얻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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