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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지구인 Mar 26. 2023

브런치, 안식월의 우아한 핑계

아이 셋을 둔 10년 차 프로덕션 대표가 안식월을 하는 면죄부, 브런치.

#1


폭풍같은 일들을 끝내고 잉여의 시간을 맞아,

뜨고 있다는 브런치 집을 아내와 찾았다.


역시나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는

조금 멀어줘야 하고, 살짝 비싸줘야 하고,

바다든 강이든 물이 좀 보여줘야 한다.

 

미학을 한껏 자랑하는 건축물의 외연 안에는

넓은 천장과 세련된 조명이 호사롭다.


국민체조 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360도로 돌리며 구경하다

주문대 앞에 자연스레 이르렀는데...


메뉴판의 가격을 천천히 훑으며,

기회비용의 생필품들이 부드럽게 오버랩된다.


아이 셋을 키우는 철저한 생계형 부부의 호기로운 나들이는

시작부터 팍팍한 일상을 쉬이 떠나질 못한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부부의 가오를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며 당당히 주문에 임한다.


제일 싸지도 않고, 너무 과하지도 않은  

이쯤 되면 괜찮은 나들이로 기억될 법한 브런치 세트를 대차게 주문했는데,

커피가 안 보인다.


"근데, 커피는 같이 안 나와요?"

"커피주문은 따로 해주셔야 해요."  


이번엔,

숨기지 못한 거친 정서를

서로에게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그럼 한자..ㄴ..... "

"두 잔 주세요!"


신사임당 한분과 동등한 값어치의 브런치 세트 트레이를 내려보며,

아까 지나친 점심특선 샤브샤브 11900원! 현수막이 아른거렸지만,

창밖 풍경 넓은 강 위를 스쳐가는 백로 같은 갈매기를 보며, 일렁이는 마음을 쓰다듬는다.


"여기 좋네."

"맞아. 샤브샤브 집에선 못 볼 풍경이야."


브런치는 역시, 

잉여의 상징이다. 



#2.


10년간,

영상을 만드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했다.


영화를 했지만,

10년 동안 만든 영상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다고 믿고 있)고,


카메라에 담긴 세상은

영화보다 더 반짝였(다고 믿기로 한)다.


사랑했다.

내 일을.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일"이 되었다.


10년의 세월에 바래진 마음 때문일까.

40수를 넘어오는 생의 권태로움 때문일까.


아니면,

세 아이의 폭풍 같은 성장기에 필요한 무수한 자금 조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일하는 멤버(직원)들이 자아를 찾으러 떠난다고 해서일까.   


어쨌든 2022년 우리 회사는

전화받기가 무섭도록 바빴고,

 

2023년을 맞은 나는,

더 이상 일 하고 싶지 않았다.


2022년 12월 28일,

회사 창립 10주년.


구멍회사( 구멍가게 + 회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산을 투입하고

10년의 회사 존속을 상징하는 VIP들을 모시어,


최초의 회사 공식 행사이자, 창립 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러냈다(고 치자).



돌아보니, 그 시간은

살아남은 10년의 경하이기도 했지만,


"저 힘 다 썼어요. 당분간 건들지 마세요!" 의

속내였을지 모르겠다.


2022년의 미어 치는 영상들을

수정하고, 납품하고, 수금하고 나니,

2월을 훌쩍 맞는다.


이젠 정말,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3.


같이 일하던 세명 중에 참 아끼던 두 친구가

꿈을 찾아 회사를 떠났다.


하나는 영화를 하러,

하나는 그래픽 노블을 쓰러.


헛헛함과 자괴감으로

일주일쯤 진하게 보내고 있는데,


질감이 매우 반짝이는 단어 하나가

도적같이 턱 하니 찾아든다.  


안식월!

지금인가?


10년 근속한 친구가,

꽤 친한 동네친구이자 대형교회 목사님이 하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유니콘 같던 그 이름!  


안식월.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 길,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었다.


길을 걷고 있거나,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면,

주위 시선에 몹시 부끄러웠을 만큼 크고 길게.


머리가 열리는 것 같았다.

신이 났다.


자전거 속도계가

39km를 찍는다.  



금세 도착한 집의 주인, 아내님께

조심스레 상소를 올린다.


"나 안식월 할래."

"......."


"돈 있어. 몇 달 치는."

"...  그래! 자격 있어. 여보는."

 

그 자격이,

10년간 일해서인지,

아니면, 몇 달 치 놀아도 되는 돈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흔쾌히, 좋(다고 몹시 믿고 싶)은 얼굴로

나의 안식을 겸허히 허락해 주신다.

 

일단,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돈 버는 일을 안 하기로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놀고 있다는 죄책감에 면죄부 하나는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최소한의 가치지향적 활동 하나를 생각하다가.


'브런치!"를 생각한다.

작가등록!


세상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자의 기록이라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 난,

"그 승자 이상의 길"을 가려한다.


10년 만에 얻은

안식월과 함께.


불현듯 걸려오는 고객사의 전화 한 통에

나의 안식월은 풍비박산 날 수 있을테지만,  


그 정도의 긴장감은 또,

안식의 MSG 아니겠는가!


10년의 노역,

그리고 100일의 안식!


중간에 클라이언트님들의

도적 같은 연락이 오시겠지만,


일단 대차게 5월까지! 외쳐본다.

쩨쩨하게 한 달 말고!


나도 모른다.

무얼 하게 될지.

또 얼마간 하게 될지.


그러나 허락된 기간에는,

신나는 일 하나씩을 만들자 러프하게 생각한다.


ENFP 니까.


그리고 20대 때 했던,

1년의 세계여행 때처럼,


그저 하루만 살자

다짐한다.


그렇게 불안정한 안식의 여정은

승자들의 숭고한 리츄얼! 글쓰기와 함께하는 걸로.


그렇게 10년만에 처음 맞이하는 잉여의 시간을 

브런치에 드립니다.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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