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월이 진짜 시작되었다
#1.
나를 늘
애잔하게 여기는 친구가 하나 있다.
꽤 내로라하는 회사들을 서핑하듯 옮겨 타며,
세상의 다른 층에서 살고픈 야망가.
하지만, 마음 한켠엔
때타지 않은 "성정"을 본능적으로 그리워하는 겉바속촉 친구.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누군가 말했던가.
그래서 이 친구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다.(하고 넘어가자)
여하튼, 이 친구는
아이 셋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나의 생을 연민하고,
소박한 회사를 힘겹게 끌어가는 나의 업에 안타까워하며,
늘 건더기 있는 잔소리로 마르지 않는 애정을 주는
매우 지구력 강한 친구다.
어쩌다 보니 10년의 세월을 버텨 이 안식월을 맞이한 내게
친구는 꽤 호화스런 호텔 숙박권 하나를 대차게 선사해 주신다.
세 아이를 장모님께 맡기고
3년여 만의 부부 외박을 감행하게 된 곳은
수도권에선 함부로 만나기 힘든 규모의 거대 호텔, P.
7000억짜리 호텔이라 그런지,
위용부터가 예사롭지 않구나.
#2.
짐을 푼다.
늘 했던 건,
무수한 아이들의 무수한 생필품이 담긴
이민가방 크기에 비견할만한 거대 캐리어 해체였건만,
이번엔 그저 책가방 하나가 전부다.
그렇게 양손부터 몹시도 다른 여행이
거짓말같이 펼쳐진다.
창으로 보이는 뻗은 땅과 트인 하늘,
그리고 간헐적으로 그 풍경을 오르내리는 비행기가
일상을 떠났다는 현실을 실감케 해주는 멋드러진 오브제가 된다.
곧바로 옷을 장렬히 풀어헤치고
침대에 몸을 다이빙하듯 던진다.
가히 7000억짜리 호텔의 침대 쿠션은 몹시 다른 질감으로
우리를 너무도 부드럽고 우아하게 안아준다.
역시나 좋은 침대의 감촉은
맨몸으로 느껴줘야 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을 만큼의 충만한 정서가
몸 밖에서 안으로 스멀스멀 스민다.
왜 이렇게까지 좋지?
뭐 했다고.
시작이었다.
삶을 너머 떠남으로 온 시작.
그렇게 2시간,
꿈과 현실 사이를 뒹굴었다.
자도 좋았고,
깨도 좋았다.
그리고,
둘 사이가 다를 바 없는 게 더더욱 좋았다.
#3
호캉스가 몹시도 낯선 우리는
호텔에 무엇이 포함되었는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카운터에 전화를 돌렸다.
수영장, 사우나, 피트니스, 게임방….
뒤는 의미가 없었다.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날은 0도 언저리.
야외 수영장 물 온도는 25도.
자쿠지는 40도.
겨울의 한기와
수영장의 온기가
한 몸 안에서 절묘하게 요동친다.
아포가토가 된 것처럼...
머언 지평선 언저리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제와 내일의 복잡했던 것들이 물러가고
그저 지금, 이 찰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어떤 성스런 반열 같은 곳에 오른 느낌이다.
그렇게,
노을이 지는 지평선과
수영장의 수평선을 위에서
잠자던 몸이
깨인다.
몸이 시작이다.
감각이 현실이다.
안식월이
진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