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람에게서 만난 세상.
역시 여행은,
만남이다.
보통은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은
애정하는 이와 함께 여행을 계획함이 다반사이나,
사실, 홀로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가장 쉬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빈손이어야
비로소 무언갈 쥘 수 있다고 해야하나.
15년전,
1년간 중동과 유럽 15개국을 홀로여행하며,
혼자 떠날때만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진탕 느꼈던 여행의 경험을 빌어,
제주에서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로
[나홀로 Jeju, 자전거 일주 여행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 1.
자전거 길은 매끈하지만,
그 길은 바다를 다 담지 못한다.
첫째날, 제주에 자전거를 처음내려,
난 더 깊이, 더 거칠게 바다를 보고팠다.
더깊은 바다를 원할수록
길은 더 거칠었다.
여행의 맛은 역시,
오프로드 아니던가.
목적지도, 동행자도 없는 여행은
모름지기, 거친 땅에 발자국을 좀 내면서 가는거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이고, 끌고, 비틀며
오프로드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데,
곡선을 돌아 나온 길에서
갑자기 어떤 사내 하나가 길을 막고 서는 게 아닌가.
예상치 못한 만남에
흠칫 놀란 눈으로 사내의 자태를 가늠해 본다.
얼굴은 꽤 샤프했는데, 바람에 풀어해쳐진 머리와 원주민 같은 행색이
그의 정체를 가늠치 못하게 했다.
사실, 그 길은
자전거 길 곁, 가파른 내리막 아래
인적인 몹시 드문
수풀이 우거진 길이었다.
"저기... 사진 한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엥?"
"놀라셨어요? 죄송합니다.
내키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돼요."
갑자기 커다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뭐지 너무도 갑작스럽게 놓인 갈림길은...'
순간, 15년전 스위스 인터라켄 기차역,
나를 붙잡고 사진을 부탁하던 예쁜 유럽 두 청년이 떠올랐다.
세상을 만나며
아름다운 지구과 경이로운 문명에 황홀해 하던 나는,
그 유럽 청년에서 기꺼이 그리고 친절히 사진을 찍어주고,
지갑을 홀랑 털렸다.
"어릴 적 부모님이 저기 등대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똑같은 배경으로 똑같이 사진 한장 꼭 찍고 싶어서요."
순간, 등대를 보았다.
족히 300미터는 돼 보였다.
등대도 보았지만,
사람을 찾았다.
동행자가 있는지.
그리고 1대1로 대치하면 승산이 있을런지 가늠해 본다.
다행히 일행은 없다.
그리고 다시 사내를 보니 그리 체격이 좋진 않다.
사나이의 결기를 담아
한마디를 내뱉는다.
"갑시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등대로 가는 머언 길,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려 부드러이 말을 건낸다.
여차하면 대치모드로 갈수 있으니,
호의를 보이되, 상대를 알아야 한다.
"여행왔어요?"
한마디 질문에 사내는 보따리를 푼다.
"네. 혼자요.
사실 전 대학생인데, 시험 기간 피해서 그냥 제주도에 왔어요.
그리고 공항에서 자전거 빌려서 무작정 바다따라 달렸는데,
여기 등대가 예전에 엄마 아빠랑 여행와서 너무 신나게 놀았던 곳이더라고요.
그래서 꼭 사진 한장을 찍거싶어서 30분째 기다렸는데, 선생님이 처음 이 길을 지나셨어요."
사내의 얼굴을
다시 천천히 보았다.
출처를 알수 없는 미스테리했던 사내는 없어지고,
사진 한장이 세상의 유일한 바램인 동심이 담긴 소년같은 얼굴이었다.
"도망 왔네요!"
"네. 그래서 짐이 책가방 하나에요. "
등대에 도착해 사내의 어릴적 사진을 천천히 훑어보며
찍을 구도를 디테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카메라 20년차의 숙련된 스킬로
절묘한 구도를 포착하여 사내에게 무심한듯 건냈다.
"이럴수가. 완전 똑같네요.
진짜 감사합니다."
너무 흡족해하며, 한참을 사진을 들여다 보는 사내의 얼굴을 보는데 웃음이 났다.
"밥 먹었어요?"
"아니요!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그 사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다와 닿은 거친길을 달린다.
함께 밥한끼 먹으러 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항해하는 길 같았다.
겨우 도착한 식당, 전복죽집.
유난히 파란 바다가 통창을 가득채운 절묘한 식당이었다.
자리를 잡고, 전복을 시키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내는
의학도였다.
늘 잘해왔고, 여전히 잘할수 있을 것 같았던 의학도의 길은,
꽤 만만치 않았다 했다.
본과에 들어가 미어치는 시험을 한바탕 새차게 끝내고
도망치듯 비행기를 탔다 했다.
그리고 자기가 그토록 좋아했던 멍때림이 그리워
하염없이 바다를 보러 떠나온 여행이라 했다.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는데,
눈이 참 맑다.
그리고 이 사내와
이렇게 마주하여 밥을 먹는 이 순간이 그냥 신시하고 우스웠다.
밥은 화장실 가는척, 내가 샀다.
사내는 몹시 안타까워 했고, 기어이 번호 따서 카톡 송금을 해왔다.
"서울가서 더 비싼 밥사요!"
사내는 한참을 고개를 떨구더니,
고개를 들며 한마디를 힘주어 건낸다.
"3만원짜리 밥 사겠습니다!"
마음이 안전한 자에겐,
세상이 안전하다.
#2.
둘째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가 와서 어쩌냐 하겠지만,
비 오는 날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있으니,
거리를,
통채로 가질 수 있다.
비야 좀 맞을테지만,
댓가는 늘 있게 마련 아닌가.
비에 젖은 길은
세상 천지에, 바다와 바람과 그저 '나'만이 홀로 존재하는 특권을 준다.
이 맛이지!
지구 행성 광활한 대지 위, 완연한 홀로를 경험하는 경이로움!
그 충만한 고독의 시간은
누가 얘기해주어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른 깨달음 같은 걸 준다.
한참 동안, '천상천하 유아독존 놀이'를 즐기고,
문명의 정거장, '카페'에 이르렀다.
제주의 시그니쳐 메뉴라 소개하는 현무암 라떼와 함께
호젓한 카페 곁 창가 자리 구석지에 찾아 든다.
그렇게 비와 바람에 몸을 마음을 씻어
단아한 정서에 한껏 머물러 있는데,
옆자리에
"어머님들"이 앉으신다.
역시나 어머님들은
어디서나 어김없이 세상의 중심이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의 충만한 순간은
급히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 가신다.
황급히 소나기 피할 데를 찾듯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어머님의 목소리로 한마디가 또렷이 들린다.
"젊은 애들은,
머리날리는 것도 예쁘다."
갑자기 혼란한 세상의 틈을 비집고
곱디 고운 시 한 구절이 날아 든다.
새차게 일렁이던 마음의 물결이
갑자기 고요를 만난다.
곁에 있던 다른 어머님이 한마디를 잇는다.
"우리도 저때는 저랬어."
그 말에 머물러
창밖을 내다 본다.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된다.
#3
마지막날 밤을
성산포에서 맞는다.
역시 홀로 여행은
게하 아닌가.
국민학교 시절, 짝을 정하는 제비뽑기처럼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이들과 밤을 보낼지 모르는 낭만이 여긴 있지 않는가.
아이 셋 딸린, 아저씨는
오랜만에 기분이 좀 신선하다.
비를 가르며 밤 늦게 도착한
소박한 마을, 한적한 게스트 하우스.
이름이 마음에 든다.
'슬로우 트립'
마당에 도착하여 몸을 내리는데,
마당 곁에 모여 있던 두명의 남녀가 길게 시선을 준다.
"이까지 자전거 타고 오셨어요?"
"우와. 대단해요! 멋지십니다."
"네. 뭐 타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여기 분위기 괜찮네.
"혹시 식사 하셨어요? 뭐 시킬까 하는데. "
"하하. 같이 뭐 드실까요?
그렇게 제주 땅의 마지막 저녁,
마늘 족발과 함께 여행자들이 어우러진다.
다들 홀로 온 이들이 같은 터, 같은 때에 모였다.
여섯이다.
다들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제주에 홀로 온 서사를 풀어놓는다.
부드럽게 한마디를 내가 건낸다.
"다들 사연이 있으시군요."
"제주에 홀로 왔는데,
사연 없는 사람 어딧습니까?"
옳다!
우리는 그렇게 사연으로 홀로들의 밤을 섞는다.
맥주가 다 떨어져 밤이 끝나나 싶은 찰나,
한 청년이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병이라며 테이블에 와인 하나를 예쁘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청년의 사연이
담백하하고 짧지 않게 이어진다.
청년은, 공기업에서 11년간 감사 일을 하고 있는데,
한달 안식월을 받아 전화를 차단하고 제주로 무작정 날아온지 18일이 되었다 했다.
10년을 일하니 정신이 황폐해졌고,
그때부터 한국의 명산 100개를 탈 마음으로 지금껏 80개쯤을 탔는데,
이번 여행에서
제주의 모든 오름을 오르고 가리라 굳게 마음먹고 여기 왔노라 했다.
그렇게 오름을 서너개씩 오르며 초반을 보내다가,
게스트 하우스에 빠져 낯선 여행객들과 노니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며 웃는다.
그렇게 여행의 컨셉이 바뀌고는
곧장 마트로 달려가 술을 가득 사서 차 트렁크에 가득채웠단다.
그리고 어딜 가던 술을 꺼내 함께 게하에 머무는 객들과
낮과 밤을 보내는 일이 너무 신난다 했다.
또 재미난 건,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을 공항까지 태워 보내주는 일을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쓰는 한시간이 자기는 하나도 아깝지 않을 뿐더러 참 갚지다 했다.
일에 치여,
바닥이 훤히 보이는 메마른 시절,
그 청년에게 자기를 채우는 일은 그저,
산을 타고, 만나는 이들에게 기꺼이 자기의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 Epilogue
남루한 행세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뛰쳐 나와
날 격하게 안아준다.
아이들의 온기가
여행은 끝났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묘한데,
아내가 하이톤으로 한마디 해 주신다.
"4일 보내줬으면, 좀 일찍 와야지, 11시가 뭐냐? "
아내가 무척
남편을 보고 싶었다.
역시, 10년이 돼도,
아내는 슈팅스타 같다.
당장은 모르던 것들이
지나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앎을 유예시켜 두고 싶은 것들도 있다.
결혼을 하고 처음 떠난 홀로여행,
오래 이 여행에 마침표가 잘 안 찍혔다.
여행을 다녀와 여행을 곱씹는데,
여행때는 못 느끼던 단맛이 밥알을 꼭꼭 씹을때처럼 은은히 밀려온다.
"삶은 그 사람이 살았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에 있고,
그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있다.
그렇게 '기억하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 정확히 놓인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닌 ‘우리들’의 삶이 된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