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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힘들 때 위대한 어머니들을 생각해

비교한다, 비교하지 않는다.

by 미쓰한

봄꽃 피는 무렵이 가장 괴로웠다. 그 계절엔 사람들이 버릇처럼 새로움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도서관에 갈 채비를 하고 현관을 나오면 아파트에 설치된 작은 광고용 모니터가 소리 없이 시끄럽게 ‘새 학기’랄지, ‘시작’이랄지, 여백 없이 활기찬 단어들을 쏟아냈다. 도서관에도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건물 곳곳에 부착되었다. 그럼 나도 '새로움'이 간절해져서 도서관 말고 딴 곳에서라도 공부할까 싶었지만, 대부분 커피값을 생각하며 도서관에 눌러앉곤 했다.


그 시기의 내 공부내용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빤하고 지겨운 문장을 연속으로 읽고 암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단순한 이 작업에서 무엇이 제일 괴롭냐 하면, 잘난 체하며 쭉쭉 읽어낸 그 빤한 문장들을 답안지에 제대로 쓰려거든 모든 것이 돌연 새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이 빤한 문장들을 다 쉬이 적었겠지?’하고 생각이 드는 것도.


‘우리 시험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잖아요.’

내 멘토가 첫 만남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쉽게 동의했다. 내가 모르긴 몰라도 다른 전문직 시험들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축에 속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이 시험을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시험들과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그저 암기를 해서 붙여 넣기 하는 수준이라니. 반복하고 단기간 암기력을 끌어올려 쏟아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말 어려워요.’

내 멘토는 바로 모순되는 문장을 말했는데, 그것 역시 나는 무너지듯이 동의했다. 도전해 볼 만하다고 해서 만만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아니, 좀 만만하다고 생각했던가?) 당해보니 종전의 생각에 대해 몹시 송구스럽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선가 타인의 고통은 늘 오해에 기반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림자놀이처럼 보이는 것을 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대부분 빗나간 추측이나 오해였다. 물론 고시생들의 고통을 내가 아주 딴판이라고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 것이 되기 전까지 아주 막연한 것이었으나, 내 것이 되고 나자마자 아주 구체적인 것이 되었다.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인 고통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위대한 어머니들을 생각했다. 둘째를 낳은 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는 친구, 임신 중에 폐에 물이 차서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도 임신중절 없이 아이를 지켜낸 친구, 벌써 셋째를 임신해서 산달을 앞두고도 첫째의 등교나 둘째의 잠투정까지 보살피는 친구. 사실 그 자잘한 수식어가 필요 없이 그냥 한 생명을 낳아 부모역할을 하는 친구들 모두. 나는 그녀들을 보며 육아의 세계를 가늠해 본다. 얼마나 힘들까 내가 오해하는 것보다 무조건 몇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시공부가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가. 언젠가 육아의 세계로 입성하는 날이 오면 고시공부의 고통이 나았다고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고시공부는 어찌 되었든 시험날까지만 버티면 끝난다는 희망 같은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부러워서 위대한 어머니들을 생각했다. 도서관 가는 길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도서관 개관시간은 등교시간과 겹쳐서 말랑하고 귀여운 것들이 교문으로 폴짝폴짝 뛰어들어가는 것을 자주 구경하곤 했다. 교문에 들어서는 아이를 향해 손을 휘적이는 엄마들은 거의 내 또래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고 여전히 책가방을 매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 상황에 대해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누리고 싶었던 평범한 결혼이나 육아를 포기하고 고시공부에 도전하게 된 이유는 어차피 결혼준비는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 육아는 말할 필요 없이 아주 힘든 일이기에 결혼을 하고 애를 키우며 고시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런 대단한 인생 과제에 앞서 원하는 공부를 해보는 것이 계획적으로 순서가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평범함을 과감히 포기하고 계획적으로 전문직에 도전하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너절한 변명의 문장을 곱씹으며 교정해 본다. 이게 정말 내가 '계획'한 것이 맞나?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안에 결혼이나 육아가 있기는 했었던가? 과감하게 포기한 척했던 그 기회들이 한 번이라도 내 것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대답은 모두 아니오. 인생의 큰 계획을 내 마음대로 하며 살았다는 생각은 얼마나 오만한가. 나는 깨닫는다. 그런 건 어차피 계획해 봤자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그때 주어진 대로 잘 살아가면 그뿐이지, 평범함을 거부하고 대단한 도전을 한 척 하기는...


나는 힘들 때마다 위대한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떤 비교는 달콤했고, 또 어떤 비교는 조급했다. 모두 실체가 없는 합리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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