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회고록 중 백악관 운영에 관한 부분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 뿐만 아니라 조직에서 의사결정권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읽어 보아야 하는 내용이다. 특히 왜 다같이 회의를 해서 결정했는데 실행이 되지 않는지, 내부 문제가 왜 자꾸 밖으로 새어나가는지 궁금한 분이라면 말이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프로세스'를 강조했다. 백악관 팀이 당면한 과제를 모든 가능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가능한 해결책 중 놓치는 것이 없도록 체크하도록 했다. 관련된 모든 공직자들이, 즉 장관부터 회의에 참석한 가장 낮은 직급의 행정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의견을 개진하도록 했다.
이런 프로세스를 만든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오바마는 회고한다. 오바마가 취임하자마자 알게 된 것은 깔끔한 해결책이 있는 문제는 대통령에게까지 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저 아래 어디에서 누군가가 이미 해결했다. 백악관에까지 오는 이슈는 제한된 성공 가능성을 가지고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다. 완벽한 해결책을 찾느라 주저하면 정부 기능이 마비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직감(gut)에만 의존하면 선입견을 따르거나 정치적으로 쉬운 해결책만 찾게 된다.
하지만 건전한 프로세스를 거치면, 즉 자신의 에고(ego)를 내려놓고 관련된 사실관계와 논리를 최선을 다해 경청하고 이를 자신의 목표와 원칙에 비추어 보면, 어려운 결정을 한 후에도 밤에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정보를 접한 다른 누군가가 결정권자였다 하더라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면 모든 관련자들이 그 결정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정책 집행이 더 잘 이루어지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에 정보를 흘려 백악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 또한 줄어들게 된다고 오바마는 얘기한다. 내부 정보 유출이 생기는 원인에 대한 이 정도로 예리한 진단과 이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이런 이상이 늘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은 아니고 오바마 행정부도 좋은 프로세스와는 별개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오바마가 백악관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언급한 것은 취임 초기 어느 일요일 오후 백악관에서 한 금융위기 관련 마라톤 회의를 회고하던 중에 끼워넣은 설명이다.
오바마 회고록의 특성과 매력이 바로 이 점이다. 건강보험 개혁, 외교정책, 백악관 인사 이런 식으로 거창한 테마를 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겪은 일을 무심한듯 회고하다 그 스토리와 엮어 중요한 주제를 끼워넣는다. 예를 들어, '언제 무슨 입법을 하는데 공화당의 필리버스터 때문에 x고생했다'라며 운을 띄우고, 필리버스터의 유래와 문제점에 대해 요약 설명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다음, 다시 실제 사건으로 돌아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혹은 왜 좌절했는지 얘기하며 마무리한다. 그런데 중간에 나오는 이슈 설명 자체의 퀄리티가 대단히 높다. 필리버스터나 금융위기 원인에 관한 요약은 일타강사 수준.
다시 백악관 회의 얘기로 돌아가면, 정권 잡자마자 전례 없는 금융위기를 해결해야 하니 그날 회의도 어려웠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래리 서머스와 재무장관 팀 가이트너가 충돌했다. 오바마도 재무장관이 제시한 방안이 큰 흐름에서 맞다고 생각했고 결국 나중에 그렇게 되었지만, 관료 출신 가이트너는 불같은 성격에 좌고우면하지 않는 독설로 유명한 선배 재무장관 서머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경제논리와 별개로 정무적 판단과 지지율 방어를 해야 하는 오바마 정무팀('Axe and Gibbs')도 할 말이 많았다.
회의가 잘 풀리지 않자 오바마는 이발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까 그 때까지 해법을 찾으라고 지시한 후 백악관 2층 레지던스로 올라가 버렸다. (아니, 이거 거의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수준의 갑질 악덕 대통령 아녀...) 다행히 그 사이에 회의는 프로세스를 거쳐 타협점을 찾고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누군가 AIG 보너스 얘기를 꺼냈다. 구제금융을 받은 보험사 AIG가 임직원에게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그 대상에는 금융위기를 초래한 바로 그 금융상품 관련자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임직원과 계약한 보너스에 정부가 사후적으로 개입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오바마 폭발: "지금 농담하는 거지? 다들 나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들을 했군."
대통령직에 대한 또다른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좋아도 해결 못할 사고가 생길 때도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냥 망한 경우가 있고, 마티니 한 잔에 담배나 태우면서 속으로 삭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도 분명 있었다.
집권이란 이런 거다. 최고의 인재를 모으고 프로세스를 갖추어 과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또한 권력의 무게에 걸맞는 짐을 어쩔 수 없이 지고가야 한다는 것. 특정 국가, 특정 정부 혹은 특정 리더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경우들이 참 많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