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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기엄금 Mar 03. 2024

적어도 끝까지 멈추지는 않았다.

초보러너의 42.195km 마라톤 풀코스 도전기

돌아보면 러닝에 처음 빠지게 된 건 단순히 ‘멋있어 보여서’ 였습니다.


몇 해 전부터 러닝문화가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 건강한 에너지와 패션이 좋았거든요. 여러 여건상 크루까지 들 자신은 없고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서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록, 거리 같은 목표 없이 오롯이 달리는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시나브로 거리를 늘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10km 그다음 하프정도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성취감은 깊고 짙게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표현대로 ‘밥도 쌀도 나오지 않는’ 그저 달리는 이 단순한 행위가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러닝을 오롯이 즐기는 것과 대회를 준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안되면 말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신청했을 때와는 다르게 막상 대회가 다가오니 완주에 대한 욕심은 커지는데 준비가 전혀 되지 않으니 엄청난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과 사람에 치이고, 퇴근 후 집에 오면 만삭인 아내 식사를 챙기고, 산책도 가고, 청소며 빨래며 설거지까지 살림을 챙겨야 하는데, 러닝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많이 배려해 준 덕분에 틈틈이 달릴 수는 있었지만 대회를 준비하는 데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요. 당시 저는 ‘무비유환’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주말을 이용해 일주일 동안 10km 두 번, 20km 거리 한 번 정도를 뛰면서 벼락치기를 했더니 족저근막염이라는 친구가 생기더라구요. ^^


뛰기는커녕 걷기만 해도 발바닥 안쪽에 통증이 느껴져서 대회 직전 일주일 동안은 전혀 달릴 수 없어서 매우 우울했습니다. 대회를 포기할까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아내의 출산 후에는 이렇게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참가는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싱숭생숭한 대회 하루 전 날, 아내와 산책을 하는데 몹시 예민해져 있는 제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아내가 완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잘 즐기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도전하는 자체가 멋있다고. 이번만 기회가 아니라고. 큰 용기와 위로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대회 당일,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는 건강한 에너지를 느끼며 설레이며 힘차게 출발하였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5km 부근, 역시나 예상대로 발바닥에서 통증이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 누가 뒤에서 제 발을 밟더라구요. 약간의 짜증과 함께 뒤를 돌아봤는데, 저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시각장애인분이 헬퍼와 서로의 손에 끈을 묶고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겨우 발바닥이 조금 아픈 것 가지고 온 세상의 아픔을 내가 다 짊어진 것처럼 행동하는데, 누군가는 제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깨부수는 모습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0km, 누군가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잊는다고 했던가요. 발바닥의 통증이 익숙해진 건지, 마비가 된 건지 알 순 없지만, 느껴지는 통증이 줄어들었습니다.


20km, 걷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지는 발을 가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절반까지 온 스스로가 너무 기특하게 느껴졌습니다.


30km, 달리는 순간순간마다 내 인생 최고 거리 기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약간의 러너 하이가 온 것 같기도 했어요.


35km 부근, 많은 분들이 마라톤은 35km부터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급수대에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다리에 경련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면 아예 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고, 내 정신과는 별개로 준비 부족으로 몸이 버텨주지 못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이스를 늦추어 조심조심 몸상태를 체크해 가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40km, 5시간 안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그런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내 도전과 지금까지의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끝까지 포기만 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42.195km, 마지막 언덕을 지나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4시간 50분. Sub 5도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대하던 결승점에 들어와서 느껴지던 감정은 당황스럽게도 ‘허무’였습니다. 출발 전에는 완주를 하면 막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성취감이 들고, 마약을 한 것처럼 엔돌핀이 분비되어 러너 하이 상태가 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조금 놀랐습니다. 너무나 허무해서.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나 불안해하고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 여기서 다섯 시간이나 이렇게 달린 걸까. 결승점에 통과하고 완주메달과 간식, 출발 전 맡겨둔 개인 소지품을 찾아서 마중을 나온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낮잠을 실컷 잔 후, 저녁에 아내가 좋아하는 디즈니영화 ‘소울’을 보는데 이런 대사가 나오더라구요.


젊은 물고기가 있었는데 나이 든 물고기에게 헤엄쳐가 물었지.


“바다라고 하는 걸 찾는데요.”


“바다?” 나이 든 물고기가 말했어. “여기가 바다야.”


“여기? 이건 그냥 물인데.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결승점을 통과한다고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게 아니라는 걸. 진짜 소중하고 중요한 건 완주라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딛었던 한걸음, 그날의 공기와 온도,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부신 가을날. 흘린 땀방울과 내가 느낀 감정들이 존재하는 순간순간의 과정이었다는 걸.


글이 많이 길었네요.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아 스스로 오랫동안 잘 간직하기 위해, 또 많은 분들에게 공유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 모두 깊어가는 가을날,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 보내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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