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이 지났다. 생후 보름도 안 된 로디를 데리고 친정댁에 들어갔던 때가. 분양 받은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10개월이 남았는데 그동안 살 집을 구하자니 비용, 시간, 장소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타지로 출장 간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데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집도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컸다.
출산 두 달을 앞두고 단기 임대부터 전세까지 넓게 알아보았으나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던 그때, 친정 엄마에게서 제안이 왔다. 친정집 1층에 세 들어있는 가게가 있는데 한 구석에 빈 공간이 있단다. 거기에 우리 이삿짐을 집어넣고 친정집에 들어와 살라는 것이다. 그 제안에 내 반응은 어땠을까. 유레카! 소리를 쳐도 모자랄 상황이었으나 단박에 “싫어.”가 나왔다.
환기도 잘 안 되는 곳에 가전, 가구, 옷을 넣어둘 바에 돈을 쓰고 짐 보관 센터에 짐을 맡기겠다, 아빠 차 한 대 주차하는 것도 버거워서 삼각대를 세워놓고 사람들과 싸우는 와중에 남편 주차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아무리 출장을 가 있어도 언젠가는 돌아올 남편한테 처가살이 하자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를 덧붙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이유는 핑계에 가까웠다. 엄마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마음은 ‘이제야 그 집에서 나왔는데.’였다. 남편, 나, 아이. 셋만의 집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집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짓눌렸던 마음을 멀끔히 펼치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제일 편한 곳’, ‘쉴만한 곳’이란 심상을 주는 집을 나또한 이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친정 부모님과 앙숙 관계는 아니었다. 나.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귀한 딸이다. 하지만 아픔 없는 가정 없듯 내게도 집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그때의 아픔을 생각나게 할 많은 요소들이 있다. 16년을 살았는데 상처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 남편과 아이까지 데리고 친정집에 들어가야 하는 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늘어놓은 이유들을 가만히 듣고 있는 엄마 심정을 이해할 여유가 당시의 내겐 없었다.
그런데 엄마의 제안 뒤에는 딸바보 엄마의 분투가 서려 있었다.
3층 건물인 친정집은 1층의 두 곳에서 세를 받고 있었다. 한 곳은 짐만 넣어져 있고 사람은 없는 공간, 다른 한 곳은 매일같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엄마는 딸 가정의 이삿짐을 넣기 위해 짐만 넣어 둔 세입자에게 짐을 빼달라고 이야기할 참이었다. 그러면 짐 보관만 하던 공간의 세를 포기해야 하지만 엄마는 오갈 데 없는 딸이 더 중했다. 그러다 그 옆 세입자에게 빈 방이 있음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세입자에게 비워둔 공간의 사용을 허락 받고, 방 치수를 재며 가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곰팡이가 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구상했다. 세를 포기할 각오도 했고, 세입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빈 방을 써도 되겠냐고 물어봤던 엄마의 결심과 노력은 알지 못한 채 난 갖가지 이유를 대며 어떻게든 엄마의 제안을 거절해보려 한 것이다.
엄마가 내 본 마음을 안다면 더 상처였겠지만 중요치 않은 여러 이유들로 거절하는 내게 이미 충분히 실망했으리라. 그런 나에게 엄마는 한 마디를 던졌다.
“니는 어떻게 모든 걸 다 갖추면서 살라 하노.”
사실 꼭 모든 걸 갖추려 한 건 아니다. 주차야 다른 곳에 월주차를 알아볼 수도 있고, 가전과 가구도 손상되면 마음 아프지만 새로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진짜 마음은 숨겨야 하기에 난 ‘모든 걸 갖추며 살려는 딸’로 남겨지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 말을 듣고 보니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내가 생각하는 최소는 무조건 가져야 한다. 내가 정한 기준 아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그 최소라는 기준이 누군가에겐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할 높은 이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최소가 나에겐 ‘모든 것’일지도.
결국 엄마의 제안대로 우리는 10개월 동안 친정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만 3년 쯤 되던 작년 9월. 이번엔 부모님이 짐을 싸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이유는 남편의 장기 출장.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기준은 단 하나다. ‘우리 딸이 힘들면 안 된다.’
한 달쯤 지나보니 부모님에게도 불편한 사항들이 당연히 생겼는데, 당장 시급한 문제가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에 TV가 없는 것이었다. 밖에서 체력, 정신력을 쏙 빼고 집으로 들어 온 친정 아빠에게는 TV가 절실한 피로회복제였다. 물론 외손자 로디가 살아있는 비타민이지만 살아있는 존재기에 보호자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들도 있기 마련이다. 놀아주고, 호응해주고, 지켜봐야 할 의무. 아무리 엄마, 외할머니가 있어도 외할아버지를 유독 좋아하는 로디의 레이더망에는 외할아버지가 늘 우선이다. 그에 반해 TV는 가만히 있어도 정보와 웃음을 주니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방에 TV를 놓자는 내 제안을 부모님은 한사코 거부했다. 돈을 들이지 말고 모니터 하나 두고 거실 TV에 HDMI를 연결해보자는 의견도 거절하셨다. 번거롭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모님도 납득할 만한 편한 방법으로 실시간 TV를 보는 방법을 결국 알아내지 못하자 친정 아빠는 주말에 친정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간식을 까먹으며 TV를 마음껏 보신단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여 “내가 다 알아서 TV 설치 하겠다는데 왜 싫다는 거야?”라고 말하는 내게 엄마는 3년 전과 동일한 무게로 묵직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어떻게 다 갖추고 사니, 여건대로 사는 거지.”
주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적응할 줄 아는 능력. 그 경지에 오르려면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안정을 추구하는 나는 ‘다양한 삶’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나와 가족을 끌고 가려 했다.
하지만 어찌 세상살이가 내 마음대로만 돌아가겠나. 갑자기 내 안정이 박살날 수 있고, 전혀 정보가 없는 곳에 던져질 수 있다. 그곳에서 어쩌면 부모님, 남편 도움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할지도 모른다. 극한의 고난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파트가 아니라도, 한국어가 통하지 않아도, 근처에 병원이 없어도 다 사람 사는 곳이며 삼시세끼를 먹을 수 있는 곳임을 믿는다면 그 어디라도, 어느 상황에서라도 적응하며 살 텐데.
내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지도 모를 변수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은 그저 유연한 태도, 세상을 초월하는 분을 향한 믿음. 그 두 가지 뿐일 테다. 유연해지려면 많이 구부러져봐야 하는데 생애 절반 정도는 살아온 것 같은데 아직 세상 꼿꼿한 나를 보니 한참 멀었다. 평생을 연습해야 할 유연함. 남은 시간 넘어지고 구를 시간들로 채워질 텐데 그때마다 기억해야 겠다.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고. 다시 닥칠 파도에선 넘어지지 않게 연습 중이라고.
모든 것을 갖춘 삶은 모든 상황에서도 살아갈 능력을 가진 삶이리라.
“She handled life like it was easy. Always. Even it wasn’t.”
- 영화 ‘인턴’ 중 -
* 표지 사진 출처 | Unslpash @Glenn Carstens-Pe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