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언젠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해본 적 있다.
기분을 적극적으로 티내는 사람.
부정적인 감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면 그 사람은 감정을 표현할 권력을 쥐었다. 그럼에도 주변 관계가 당장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통제할 절대 권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직장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가족, 친구,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깥 감정을 집안까지 끌고 오는 부모, 중2병을 발산하는 자녀, 관계가 끝이 나도 아쉬울 것 없는 친구가 그 관계에서의 권력자인 셈이다.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가정에도 상대적인 권력자는 존재했다. 그의 기분에 따라 다른 가족들은 말소리와 웃음을 조절했다. 웃고 싶어도 조용해야 했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굳이 티내지 않아야 했다.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그의 텐션을 고려하며 행동했다. 한마디로 실시간 눈치를 본 것이다.
그런데 그 권력에 도전하는 부류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자신에게 무감해진 상대를 되돌리기 위해 투정 부리는 연인, 직장 내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직원. 분명 부정적이고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지만 진짜 권력자와의 차이는 약자의 발산에는 불안이 동반된다. 권력을 쥔 것처럼 흉내 내고 있을 뿐 사실은 관계가 끊어질까, 공동체에서 내쳐질까 등의 불안이 목구멍을 치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처음엔 흉내에 가까웠을 것이다. 중2가 되던 어느 날, 나는 내 기분이 아니라 남 기분에 따라 내 행동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 질렸고 관계의 권력을 분배하고 싶었다. 타인의 감정에 내가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오랜 시간 고민했고 결국 얻은 답은 입을 닫고 표정을 지우는 것이었다.
큰 뜻은 없었다. 사춘기를 방패 삼아 가정 내에서 이어지는 괴로움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선택은 내 성격으로 굳어져 어릴 때의 발랄함은 온데간데없고 집에서의 대화는 말라버렸다. 그래서 가족 중 누군가에겐 내가 권력자였을 테다. 가장 어렸지만 눈치 보게 하는 존재. 내가 이걸 원했던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늘 눈치 보는 입장에서 누군가 내 눈치를 본다는 것이 새로운 감각이었을 테다.
그런데 이 감각이 아주 나쁜 습성으로 변한 것 같다. 이후 맺는 관계에서 힘을 얻고 싶을 때 본능처럼 말과 표정을 없앴다. 상대의 기분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장 낮은 층에 깔려있는 듯이.
문제는 이 습성이 아이에게 표출된다는 점이다. 아이의 기분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 기분에 아이가 따라오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내가 피곤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아이 기분이 하늘을 찌르면 그 소리가 웃음이라도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작게 웃었으면. 장난감을 살살 가지고 놀았으면. 아이가 즐거움에 못 이기는 행동들도 거슬리는 엄마.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아이의 웃음과 재잘거림이 지워질까 두려웠다.
웃고 싶을 때, 무표정이고 싶을 때, 말하고 싶을 때, 침묵하고 싶을 때.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이라니.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이 폭력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상대적인 약자에게는 더욱.
적절하게, 필요한 만큼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대상이 가족일 수밖에 없는 가정 내에서 내가 가져야 할 마인드를 새로고침해본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곧 권력이며 아이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기
✅권력 남용이 세습되지 않도록 함부로 휘두르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