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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Feb 01. 2024

훔쳐 본 일기 속 그와 나의 거리


현관에서 두 번째 위치한 할아버지 방에 노크하는 것은 귀가 후 일순위로 할 일이었다. 주무시는 줄 알고 그냥 들어왔다가 자정이 넘어 아직도 안 들어왔냐며 나를 찾는 할아버지의 호통에 질겁한 뒤론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이 단계는 꼭 통과해야 했다. 


할아버지 방을 자세히 관찰한 건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였다. 분명 서너 시간 후에야 귀가하실 것을 알고 있던 때도 할아버지 방을 (몰래) 훔쳐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문을 열면 보이는 책장 옆면에 걸린 할머니 영정사진까지. 거기까지가 내가 염탐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책장에 놓인 책과 수첩을 살펴보았다. 매일을 기록하셨던 분의 수첩을 보는 순간 그날이 생각났다. 내 결혼식 장소를 두고 아빠와 할아버지가 설전을 벌였던 때가. 가능한 할아버지의 비난과 꾸중을 다 받아내는 아빠가 할아버지 면전에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싸웠던 그 때의 화두는 내 결혼 장소였다. 할아버지는 예식장에서 결혼하는 내가 못마땅했다.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석을 붙이자면 할아버지는 비싼 예식장에서 결혼하는 손녀가, 그런 손녀의 어리석음에 함께 한 아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 평범한 예식장을 두고 ‘분수에 안 맞게 비싼 곳을 선택했다’고 비난할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일 것임이 틀림없는데 그가 우리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허탈했다. 그에게는 구청의 합동결혼식 혹은 들판에서 흰 원피스를 입고 올리는 식이 손녀 분수에 맞는 결혼식이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부자들의 결혼은 호텔에서 이루어진다’는 아빠 말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할아버지 수첩을 보고 여기까지 회상한 나는 결혼식 당일에는 내 이름 석 자 정도는 적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기는 1/3이 한자라 해독이 불가능했다. 다만 한글로 쓰인 내용만 보면 그 어떤 특별함도 흘러 있지 않았다. 결혼 후 일기장을 훔쳐 볼 기회도 사라졌기에 한자로 '손녀 결혼식'이라고 적혀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결혼을 기준으로 그 전날도, 그 다음날도 너무나 일상적인 하루였다. 설전이 오가던 그 날짜의 일기를 찾아봤으나 역시나 얼마 없는 한글만 훑을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의 훔쳐보기를 그만두었다. 


할아버지에겐 손녀 결혼 날이 그저 아침에 해가 떴고 밤에 달이 떴던 날일뿐이었을까. 그럼에도 온 힘을, 정말 몸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어 손녀의 결혼 장소를 반대해야 했을까. 


그런데 할아버지의 아들, 나의 아빠 이야기는 군데군데 보였다. 할아버지 일기에는 옳은 '나'와 틀린 '너'가 있었다. 아빠도 나처럼 할아버지 일기를 엿본 모양이다. 이미 떠난 아버지의 기록 속에서라도 자신을 인정하는 말 한 마디 정도는 기대했을 아빠였을 테다. 하지만 아빠도 나처럼 얼마간 그 일기를 보다가 덮어버렸다고 한다. 어쩌면 바랜 종이에 눈물 몇 자국이 찍혀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혼잣말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덮인 일기에서 메아리치고 있을지도. 


집 안에서 나와 할아버지의 물리적인 거리는 12발자국이었으나 마음의 거리는 12광년이었다. 그런데 일기 속에 설명된 우리는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별과의 거리를 재는 것만큼이나. 셀 수 없을 뿐더러 수치는 점점 증가하고 있을 테니. 


아들 로디가 내 일기를 볼 때는 아프지 않길. 마음의 거리가 충분히 가깝게 느껴지는 일기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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