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민혜 Jun 03. 2021

안아주세요

새벽 5시가 되면 큰 아이가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는 기척을 느끼곤 했다. 

'엄마, 나 일어났어.'라고 내게 말을 건넨 것도 아니고, 우렁차게 울어대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분유를 탔다. 반쯤 눈을 감고,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어느 지점에서 나는 기계적으로 분유를 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 지옥은 언제쯤 끝이 날까."


쌍둥이 육아가 지옥 같다고 생각했던 건 아이들이 세 돌이 될 때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힘든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힘듦을 넘어 지옥으로 느끼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누군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돌 지나면 좀 낫고, 18개월 지나면 훨씬 낫고, 두 돌 지나면 행복해져요."


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힘들 때마다 기도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면서 돌이 되기 전에는 돌이 되기만을 기다렸고, 돌이 지나도 여전히 힘들자 그렇다면 18개월이 되기를 기다렸다. 18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힘들어서 그다음엔 두 돌이 되기를 기다렸다. 세 돌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지인이 해 주었던 말이 내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 돌이 되도록 나는 아이들이 예쁘다는 생각 한 번 할 새 없이 매일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쌍둥이 중 큰 아이를 아기띠에 둘러 안고 동네 커피숍에 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내 품에서 아이는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가 그렇게 더워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나는 정신을 놓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어떤 날은 아이를 같이 봐주시는 친정 엄마와 다투고 나서 뛰쳐나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는 작은 아이를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워서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를 업고 집을 나오면 갈 데가 없었다. 서성이다가 그저 집 앞 커피숍에 들어가 창 밖만 바라보았다. 그런 내가 인상 깊었는지 어느 날 커피숍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한창 힘들 때죠?"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아들만 둘인데 이제 둘 다 초등학교 다니거든요. 우리 애들 애기 때 생각하면 진짜 너무 힘들었던거 같은데, 또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너무 그립더라고요. 안아줄 수 있을 때 많이 안아주세요. 이제 우리 애들은 안아준다고 해도 지들이 싫다고 하는데, 가끔 우리 애들이 딱 한 번만 애기 때로 돌아가서 그때의 아이들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세 돌이 지나니 지옥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네 돌이 지나니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아졌다. 이제는 밥도 앉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분유를 타러 새벽 5시에 기계적으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아이가 처음 혼자 앉고, 기고, 걷고 했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들은 그저 희미하고, 모든 기억이 뭉뜽그러진 채 '지옥 같았다'라는 문장 하나로 압축된 채 남아버렸다. 아쉽고, 미안하다. 커피숍 사장님의 말씀처럼 많이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은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아이들이 작고, 여전히 안아달라며 품을 파고들기도 한다. 내가 먼저 팔을 활짝 펴고서 '이리 와'라고 말하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온다. 그런 아이를 품에 가득 안고 있으면 마치 꿈결 같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기억 하나가 있다. 8살이나 9살쯤 되었을까. 엄마 아빠와 함께 가끔 집 근처 약수터에 갔었다. 초여름 밤, 저녁밥을 일찍 먹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산 길을 걷고 걸어 약수터까지 갔다. 어두운 산 길, 축축하고 시원한 밤공기, 청결한 숲 냄새, 가로등 불 빛에 의지해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기억난다. 아직 어두운 산 길을 걷는 것이 어린 내게는 무리였는지 어느 순간 엄마가 나를 업었다. 그렇게 나는 약수터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와 아빠 등에 번갈아 가며 업혔다. 엄마의 등은 포근했고, 아빠의 등은 편안했다. 이것이 내 어릴 적 최고 행복한 기억 중 하나다. 단지 부모님 등에 업혀있을 뿐인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더 많이, 더 따뜻하게 안아주자고 다짐한다(물론 이 다짐은 매일 실행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만 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엄마 아빠 품에 안겼던 기억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이 지옥 같아서 아이의 예쁜 시절들을 모두 놓친 채 보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안아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 안아달라며 다리에 매달리는 큰 아이를 번쩍 들어 안고는 한참을 토닥여 주었다. 먼저 안아달라는 소리를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작은 아이에게도 두 팔을 활짝 펴고 '안아줄게'라고 말했다. 이제 제법 묵직해진 아이들을 품에 안고 복숭아 같은 엉덩이를 토닥이는 순간이 행복했다. 아이들도 행복하다고 느꼈을까.


엄마 품은 포근하고, 아빠 품은 편안하더라. 너희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봄이라서 아픈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