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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민혜 May 21. 2021

봄이라서 아픈거야

병원에서 진단받은 특정 질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디가 아픈거냐 물으면 딱히 그럴듯 하게 내놓을 병명 하나 없으면서 나는 그렇게 내내 자주 아프면서 자랐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꾀병'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잔투정'으로 여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엄살이 심하다고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나약한 인간으로 보여지기도 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내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준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나를 둘러싼 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오해와 과장을 적당히 섞어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오해와 과장이라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는 여기가 아팠고, 오늘은 저기가 아프다. 말할 수 없이 너무 아파서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다녀본 것 같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단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의학적으로 정확한 진단을 거쳐 이렇다할 병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지만 본인만 아는 극심한 통증에 사는 것 자체가 참 힘든, 그래서 '증후군' 정도로만 불리우는 것을 앓으며 힘겹게 사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꽤 많이 있단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면서 내 몸에선 쉽게 임신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짐작을 했었다. 결국 짐작은 현실이었고, 원인도 알 수 없는 난임 기간을 그렇게 오래도록 겪으며, 그럭저럭 다들 견딜만 하게 진행한다는 시험관 과정조차 누구보다 힘겹게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원하던 임신이었지만 임신 기간 내내 제대로 먹지도, 다니지도 못하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각한 입덧의 과정을 거쳐 아이들을 만났다.


봄이었다.


예정일 보다 한 달이나 빠르게 태어난 내 아기들은 너무 작아서 엄마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 하고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장기가 한 꺼번에 밖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통증을 이 악물고 참아가며 수술 바로 다음 날 아이들을 보러 걸어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갔다. 각기 다른 유리상자 속에서 꼭 어른 팔뚝의 반 만한 크기의 아기들이 인형처럼 조용히 잠 들어 있었다. 내 아이들을 본 첫 느낌은 감동도 환희도, 그렇다고 슬픔도 아니었다. 그냥, 기가 막혔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라는 죄의식이었다. 생기지도 않는 아이를 인공적으로, 그 고생을 해 가며 동시에 쌍둥이로 품어 세상에 내 놓았는데, 엄마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젖 한 번 물어보지도 못 한 채 가슴에 온갖 기계들을 잔뜩 붙이고 가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유리 밖에서 그저 지켜보는 건 절망이었다. 죄책감이었다.


젖이 돌기 시작했는데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면서도 그 젖 한 번을 물릴 수가 없으니 지독한 젖몸살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출산의 고통보다도 더 한 통증이라고 말하는 젖몸살로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병원에 두고 혼자서 조리원으로 향하던 길.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벚꽃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봄의 아름다움을 즐기러 거리로 나와 있었다. 저마다 꽃 같은 표정으로 봄이 선사한 아름다운 선물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 잔인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조리원으로 갔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서 손 끝 하나만 갖다 대어도 악 소리가 나올 만큼 아픈 젖을 유축했다. 유두가 찢어져 피가 났다. 잇몸을 깨물며 유축을 했다. 내 아기들에게 한 방울의 모유라도 더 먹이고 싶었다.


사실 '몸조리를 한다'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라고 한다. 아이를 낳고 '몸을 푼다', '조리를 한다'라는 것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결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이런 분위기를 얻어 타고 출산 후 조리원에 가는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비난하는 분위기가 일기도 했었다. 물론 일부 남성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역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남들은 다들 '뼈에 바람이 들어갈까' 몸을 사리며 따뜻하고 아늑한 곳에서 조리하는 동안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몸 상태로 엉거주춤 걸어서 아직 쌀쌀한 4월의 바람을 매일같이 맞으며 병원으로 향했던 나는 분명 무모했다. 나를 위해 마련된 그 공간에 편안히 누워 쉬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거의 매일 조리원보다 병원에 가 있었다.


나보다 3년 먼저 시험관으로 쌍둥이를 출산한 친구가 있다. 그 중 한 아이가 많이 작아서 친구는 큰 아이만 데리고 조리원으로 갔고 나머지 아이는 한 달 간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그 친구는 조리원에 3주간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병원에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서 제발 좀 오라고, 아이 모유라도 좀 먹여달라고 그렇게 전화를 하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친구는 모성애가 없고, 나는 모성애가 들끓어서 그랬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무모했고, 그 친구는 현명했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모유 배달을 다녔으면서 나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모유를 실컷 먹이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지만 그저 내가 자처한 죄책감이다. 나는 미련하다.


원래도 몸이 아팠던 나는 이제 봄이되면 더 많이 아프다. 노산이었고, 입덧 때문에 임신 기간 내내 먹은 것이라고는 고작 임신 후기가 되어서나 조금씩 먹기 시작한 두유가 전부일 만큼 몸은 상해 있었다. 임신 내내 내 몸은 비쩍 말라있었고, 출산하자마자 찬 바람을 맞으며 모유 배달을 다녔다. 조리원에서 병원까지 차로 30분 거리였고, 수술한지 3일째 되던 날 퇴원을 하고 4일째되던 날부터 혼자 운전을 해서 병원으로 갔다. 유리관 속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내가 무언가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기로 한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한 것은 28주 무렵이었다. 쌍둥이 출산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계시는 곳이었다. 남자분이셨지만 누구보다 산모의 몸과 마음을 잘 이해해 주시는 '츤데레'의 매력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30주 부터 뱃 속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판단 하에 36주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해 놓고 교수님은 진료를 갈 때마다 매 주 내게 똑같이 말했다. '아이들에게 절대 죄책감 같은 것 갖지 마라', '모유 못 먹이는거 미안해 하지마라',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거 마음 아파 하지마라', '엄마 잘못이 아니다, 다 지들 팔자다', '그러고 키워놓으면 다 지들 잘나서 큰 줄 아는게 자식이다', '죄책감 갖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평생 애들한테 '을'이 되어서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 했었다. 나는 그 죄책감으로 '조리하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한 곳'에서 매일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유축만 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병원으로 갔다.


결과적으로 수술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아직까지 고생 중이고, 나는   많이 아프다. 아직 아이들은 어린데 늙은 엄마는 이미 나이 마흔이 넘었고,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나를  생각했더라면,  자책과 죄책감을 모른  했다면 지금  아플  있었을까. 그렇게 매일같이 모유 배달을 갔으면서 여전히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죄책감이 시달리며 산다. 아이들이 분유를 거부했었고, 자라서도 여전히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실컷 먹고, 쑥쑥 자랐어야  시기에 제대로  먹어서 지금도 이렇게 작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또래보다 한참이나 작아 속상해 하는 아이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운다.   잘못이다. 여전히 나는 그러한 죄책감 속에서 벗어나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때의 교수님 말씀을 이해할  있을  같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강조해서 누누히 말해 주었는데, 그러지  했다. 그래서 이렇게 몸도 마음도, 봄이되면  많이 아프다.


봄의 시작과 함께 아이들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제 좀 자랐는지 이전보다는 나은 편이다. 대신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나는 이전보다 더 많이 아파간다. 조금 서러워졌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내 아픈 것도 훨씬 덜 할 거라고. 그런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나는 갱년기가 된다. 그 때 나는 과연 괜찮을까.


내내 아파서 예상보다 꽤 오랜 기간 글도 쓰지 못했고, 쓰지 못하니 점점 더 쓸 용기도 없어져 갔다. 내가 언제부터 글을 썼다고, 나 같은게 무슨 글을 쓴다고, 그런 자기 비하에 까지 도달하는 날도 있었다. 이대로 영영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길을 잃은 것 같은 생각에 쓸쓸했다. 매일 밤 수면제 한 웅큼을 털어넣고 잠에 곯아 떨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아침에 일어나서도 한 낮이 될 때까지 내내 멍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무기력함 속에서도 글을 쓴다는 건 나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힘이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순수한 에너지였다. 아파서 글을 쓸 수 없었고, 글을 쓸 수 없으니 나는 점점 시들어 갔다. 약에 취해 하루 종일 몽롱히 지내다 보면 그렇게 글을 쓰지 않은 채 육아에만 치어 살던 일상이 사실 진짜 나에게 맞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수면제 3알과 감기약 6알과 각종 영양제 한 웅큼을 입에 털어넣고 누웠는데도 너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몇 시간을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보니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라서 그런거야. 이 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거야. 다시 행복한 나로 돌아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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