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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May 20. 2023

호퍼, 고독한 풍경의 마력

화가는 자신만의 우물을 간직하고 있다.


잠시 육지를 다녀와야만 했다. 아버지 제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생일까지 집안 행사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는 한창 귤꽃과 참꽃이 피어나는 시기인데, 해마다 도통 그 향기를 온전히 즐길 수가 없어 참으로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이 먼저인 것을. 꿩대신 닭이라고 서울 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와 성곡미술관의 원계홍 전시가 그런 나를 위로했다.




호퍼(1882-1967)의 그림 중에 오래전부터 마음에 훅 들어온 그림이 있다. 초록 외투를 입은 여인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자동 판매 식당, 1927>이다. 창밖은 이미 깜깜해서 식당 안의 밝기가 더 도드라진다. 안과 밖이 철저하게 단절되어 시간이 정지된 모습이다. 추운 길을 달려온 여자는 한 손에 장갑을 낀 채 잠시 상념에 빠져든다. 홀로 길을 떠나온 여정을 뒤돌아보다가 문득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이 점점 진하게 밀려든다. 려하지만 쓸쓸한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예전의 나를 닮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돕는다.     - 알랭 드 보통 -



그렇다. 나는 호퍼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색채의 산뜻한 대비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고독이 고스란히 나심연에 파문을 일으다. 어디를 가든 습관처럼 싸들고 다니는 외로움은 제주까지 나를 따라왔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 본연의 고독이 가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아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림 속의 인물에 공감하며 한줄기 위안을 얻다.


외로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호퍼의 그림은 한 공간에 둘이 같이 있다고 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신문에 코를 박고 있는 남편 곁에서 피아노 건반을 건성으로 두드리고 있는 아내를 그린 <뉴욕의 방, 1932>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유리벽이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하는 시선이 안타깝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다정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보다 외로움이 더 서늘하게 뼛속을 파고든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또 어떤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지만 커플마저도 모두가 낯선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밤이라는 시점 또한 절묘하다. 고독이 인간의 무의식에까지 깊이 침투한 모습이다. 군중 속에 있다한들 변하는 게 있을까. 호퍼의 그림은 서로 소외된 인물들의 단절적 관계와 심리적 풍경 묘사가 탁월하다. 정희성 시인의 표현처럼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라는 읊조림, 점점 뭉크의 <절규>가 되어 메아리친다. 


자동 판매식 식당, 1927
뉴욕의 방, 1932(좌) /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우)



고독은 어쩌면 호퍼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의 왕따 경험과 뉴욕미술대학의 동창에서 동업자가 된 부인과의 평생 삐그덕거린 관계가 그를 내면으로 안내한 것은 아닐까. 소통의 부재 자신과의 대화 더 자연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초기의 삽화와 수채화가 유화로 형식을 바꿔가며 작품세계는 한층 깊이를 갖게 되었다. 호퍼의 그림 세계는 정말로 독보적이다. 매번 한 장의 필름 안에 담긴 듯한 대담한 구도 속에서 시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세상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고독한 풍경의 마력에 빠져들게 된다.


위대한 예술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면세계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개인적인 시각으로 구성된다.  

 -에드워드 호퍼-


호퍼에게 빛은 인상파의 빛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재구성된 미니멀한 공간과 감각적인 색채 그리고 빛과 대비되는 그림자와 어둠은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호퍼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도와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자신만의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훌륭한 화가는 자신만의 우물을 간직하고 있다. 호퍼가 평생에 걸쳐 발견한 우물은 '인간의 내면'이다. 그렇게 깊이 파내려 간 우물에서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청량한 두레박을 길어 올렸다.




제주생활은 나의 고독을 여과 없이 드러내주는 장치였다. 서울을 좋아하는 남편과 제주를 좋아하는 내가 항상 붙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제주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의 숙제는 외로움이라는 커다란 산이었다. 혼자 처음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 정말 두려웠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이 나의 정신을 초토화시켰다. 지푸라기 하나 없는 늪 속에서 발버둥 치다 기진맥진한 나는 모든 힘을 탕진했다. 그렇게 마주한 온전한 고독 속에서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다. 새소리가 마음으로 흘러 다. 닫아걸린 마음이 조금씩 리며 나무로, 하늘로, 우주로, 차츰 경계를 넓혀 나갔다.


마음속으로 새로운 에너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위협하던 불안과 외로움, 두려움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안도했고 어느새 자신감까지 생겼다. 고보니 외로움은 늘 분별하며 사는 우리의 에고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저항하던 마음을 내려놓자 저절로 감정이 뒤집어지며 충만한 기쁨이 살아난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는 외로움이라는 산을 넘으며 슬픔 속에는 기쁨, 증오 속에는 사랑, 무기력 속에는 활력, 고독 속에는 충만함이라는 에너지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 벽에다 햇빛을 색칠하고 싶었다.


햇빛을 사랑하던 호퍼의 그림에선 어느 순간 인간이 사라다. 타인에 대한 의존과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진 공간에는 빛이 가득하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초현실적인 그림 <바닷가의 방, 1951>은 호퍼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경지가 읽힌다. 활짝 열린 방 안으로 가득 들어찬 햇살은 원초적인 자연의 위로와 충만감을 선사한다.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외롭거나 고독하게 읽히지 않는다. 비로소 득도의 경지인 '텅 빈 충만함'으로 거듭났다. 인간 속에서 부대끼며 소외 인간은 자연을 통해 위로받고 충족다. 그림은 나의 원픽이 되었다.  


바닷가의 방/바다가 보이는 방, 1951



이번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거듭하 65년간 지속된 그의 작업을 돌아본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천재화가 호퍼를 조우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삽화와 기록물, 수채화와 유화로 이루어진 270여 점의 작품 중에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거의 없었다. 솔직이 아쉬웠다. 물론 전시장엔 그의 명성만큼이나 긴 줄이 이어졌다. 그동안 호퍼의 그림들이 광고나 소설책, 영화에 등장하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광화문의 성곡 미술관을 찾았다. 원계홍(1923-1980)이라는 낯선 화가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호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원계홍은 과연 한국의 호퍼였다. 그는 주로 새벽에 서울의 텅 빈 골목길을 그렸다. 그러니까 그의 우물 '도시의 고독'인 셈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골목엔 균형 잡히고 색채가 조화된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다. 도시의 우수가 서린다. 대표작인 <회현동>과  <까치집>, <수색역>이 특히 내 마음을 끌었다. 호퍼의 전시로 흡족하 마음이 대신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회현동 1979(좌), 까치집 1979(우)
수색역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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