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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May 28. 2023

나의 우물은 무엇일까

<라라의 창작민화> 쉼, 느림의 미학


요즘 나의 화두는 '우물'이다.

"화가는 자신만의 우물을 간직하고 있다"라는 깨우침 이후, "나의 우물은 무엇일까"에 골몰했다. 이것은 나의 민화 선생님의 주문이기도 했다. 루씨쏜 선생님은 작품 세계가 깊고 독보적인데, 제자들에게도 작품을 하기 전에 사유를 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글쓰기 숙제를 먼저 해가야 한다. 처음에 나는 별생각 없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 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흩어진 구슬에 불과했다. 선생님은 무엇으로 구슬을 꿸 것인지 다시 질문하셨고, 초보인 나는 너무 막연해서 답답하였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림도 그냥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나로 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를 시리즈로 풀어내야 한다. 아침저녁 산책 길에 화두를 들고 나갔다. 제주에서 만난 화가들을 생각했다. 왈종은 '중도와 연기', 변시지는 '제주 바람', 김창은 '물방울', 김흥수는 '하모니즘'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떠오른다. 그것은 화가가 평생을 바쳐 천착해 온 주제들이다. 바로 그 화가만이 간직하고 있는 '우물'인 것이다.

    

마침 서울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다녀오면서 그동안 막막했던 사유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호퍼가 평생에 걸쳐 파내려 간 우물은 인간의 내면이다. 그곳에서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청량한 두레박을 길어 올렸다. 대중이 그토록 호퍼의 그림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림 속에서 자신들의 고독한 자화상을 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고독하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바쁜 일상 속에서 서로를 단절시키고 자신마저 소외된다. 도시에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숲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현대인의 고독의 본질을 ‘속도’라고 생각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구호처럼 도시에 몰려든 인간들은 성공과 성취라는 신기루를 향해 경쟁에 노출된다. 행복은 경쟁의 끝에 있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정신없이 내달린다. 나는 직장생활의 말년을 속도의 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에서 달렸다. 혁신이라는 이름표를 단 신설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라는 야심 찬 꿈을 꾸었다. 모두가 교사의 몫이었다. 우리는 경쟁적으로 달렸고, 불행히도 브레이크가 없었다. 결국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었다.       


속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곳이 느린 섬 제주다. 나는 올레길을 걸으며 생기를 얻고, 차츰 ‘느림의 미학’을 발견해 나갔다. 느림은 작고 사소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만나게 해 준다. 간세처럼 한가로이 걸으며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새소리와 파도소리에 마음을 열다 보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충만감이 차오른다.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과 거대한 자연의 웅장한 자태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겸손을 배운다. 남과 비교하며 밖으로만 내달리던 마음은 드디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늘 뒷전이던 몸과 마음을 살피고 어루만진다. 느림은 위로와 힐링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느림의 꽃이요, 절정 엇일까.

그것은 ‘쉼’이 아닐까 싶다. 나는 걷다가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면, 잠시 지친 다리를 쉬면서 풍경을 즐기고 싶었다. 그때 만난 의자는 무엇보다 반갑고 고마운 존재다. 돌아보면 제주 삶은 내 인생에 의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길에서 만난 달콤한 안식처였다. 제주의 자연도 내겐 늘 의자였다. 부대끼던 마음에 평화가 내려앉았다. 제주 집은 서울 사는 친구들에게도 가끔 쉬어가는 의자가 되어 준다. 사는 게 뭐 별 건가. 이정록 시인의 통찰처럼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 아닐까. 이제 나 세상에 편안한 의자가 되고 싶다.      




창작민화를 시작하면서 지난 10년 의 제주 삶을 돌아본다. 제주에서 만난 행복의 순간들은 늘 제주 풍경과 함께 했다. 이제 그 풍경 속에서 마주한 열정과 기쁨, 고독과 환희를 화폭에 담고 싶다. 풍경 속에는 의자를 하나씩 놓으련다. 의자는 내 그림의 오브제 될 것이다. 제주 삶을 한가로이 만끽하고 있는 나의 분신이, 감상자들을 제주 풍경으로 초대하는 제스처가 될 것이다. 바쁜  지친 현대인들에게 제주의 행복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하고 싶다.     


풍경 어딘가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날고 있다. 나비는 나의 제주 삶을 인도하는 존재이다. 한없이 가볍고 자유롭게, 현란하고 아름답게 비상하는 나비는 나의 정신이자 무의식이며 영혼이자 수호천사이다. 히치콕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한 번씩 등장하여 사인을 넣었듯이, 나는 나비를 그려서 내 그림의 증표로 삼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모든 풍경에는 '쉼'의 여유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인 의자와 자유의 상징인 나비가 등장한다. 앞으로 그려나갈 나의 '인생 숲 제주'의 풍경인 <, 느림의 미학> 시리즈를 통해 나만의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갈 것이다.     



막간의 시간을 활용하여 그린 전통민화 <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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