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고세상과 소통한다. 창이 없는 인생을상상할 수있을까.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함께 성장하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삶은, 우리가 지구별에 내려온 이유를 잊고 사는것이다. 그렇다고 창이 무조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작은 창을 여러 개 두기보다는, 풍경 좋은 곳에적당한크기의 창을더선호한다.가끔씩 창을 통해 펼쳐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충만해지는.
최근 인생에 새로운 창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중 하나는 제주도에 죽음카페를 열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창이고, 또 하나는 올레길과의 인연으로 연결된 창이다. 두 개의 커다란 창은 나를 또 다른세상으로 다정하게 이끌며 가슴 뛰게 하였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의 우주를 만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관계를 통해나의 우주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더불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딜 용기를 얻고,함께 나누는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나는그녀를선배님이라 부른다.학교 선배는 아니니까 그냥인생 선배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선배나 멘토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큰 존재이다. 제주도와 한반도를 뛰어넘어 세계 곳곳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는 유명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내 인생으로 걸어 들어왔다.나는 정중히그녀를 맞이했다. 거인의 어깨너머로 펼쳐지는 세상을 기웃거릴 수 있게창을하나 크게 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우리는 아주 가끔 서귀포 공원에서 마주쳤다.
옆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걷다 보면 간혹 마주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가볍게 목례 정도의 인사만 하고 지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차오르는 걸 느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제주 생활을 시작한 것은 모두 다 그녀의 덕이 아니던가. 올레길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 제주 이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나는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명퇴하고,올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동기들과 신나게 올레길을 걸었다. 그때 주워들은 이야기가하나있는데,제주도에는 3대 여신이 있단다. 제주도 여자들의 생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아마도 이런 연유로여신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건 아닐까싶다. 다들 알다시피 1대 여신은 제주도를 창조하고 500명의 아들을 거느린설문대할망이고,2대 여신은 조선시대의 거상으로 빈민을 구제한 김만덕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3대 여신이 현존하는 인물이라는.
올레꾼들은 정겨운 마을길과 가슴이 뻥 뚫리는 바닷길을 걸으며심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였다.자기만의 속도로두 발로느릿느릿걸어가는 길은밖으로만 내달리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정처 없이 내달리던 삶이 멈추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으니, 올레길에 중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올레길을 예찬하며,우리나라 최초로 걷는 길을 만든 그녀를신으로 떠받드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와의 만찬들
선배는 가끔 자신의 식탁에 나를초대했다.
내가 혼밥 하는 날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그녀의 온기 어린 제안이다.바게트와 포도주 한 병을 가슴에 안고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던 날, 그날은 육지에서 내려온 수녀님과 함께수월봉 올레길을 걷고 난 다음 날이었다. 나는 새로이 보금자리를 옮긴 그녀의 집 거실 창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섶섬 풍경에 넋을 잃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열정 하나로 앞만 보고살아온 그녀가 지친 몸을 뉘고 위안받을 수 있는 보금자리에 안착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먹는 일에 진심인 그녀는 요리 실력도 남달랐다. 그녀가 손수 만든 고사리 파스타와 뽈뽀 그리고 그릭 샐러드는 애정으로 가득한 제스처였고, 나의시각과 미각을 황홀케하였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유쾌, 상쾌, 통쾌한 젊은 수녀님과의 만찬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자선배는 밤바다 산책을 제안하였다. 정모시공원을 시작으로 중국 공원을 거쳐, 살며시 정낭을 열고 들어간 서복 전시관 공원에서바다를 향한 그네에 셋이서 나란히 앉았다. 보름달도 구름 사이로빼꼼히얼굴을내밀고우리의 대화에끼어들었다.
향기를 품는 관계
다른 날엔 그녀가사회적 조카와의 식사를 제안했다. 사회적 조카라니! 나는 처음 들어본 단어에 어리둥절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수많은 관계만으로도 버거울 그녀였다. 그런데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하는 관계까지 거느리고 있다니, 나는 그녀의 관계가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그러면서 그녀라는 창을 통해 신선한 산소를 공급받는 듯한활력을 느꼈다.
그날 최고의 요리는 그녀와 사회적 조카와의 관계의 역사였다. 올레길 개척에 헌신적인 공을 세운 조카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홀로 키우는어린 딸의 글쓰기 지도를 부탁한 게 시작이었다. 딸이 없는 그녀는 흔쾌히 약속을 하고 조카로서 공을 들였다.둘의 관계는 조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고, 이제 조카는딸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모녀 의식까지 치렀다고 한다.아아,그토록 어여쁘고 속까지 깊은 따님을 두셨다니! 나는 바로 맥주잔에 진심을 담아 둘의 관계를 축하하였다.너무도 뜻깊은 만찬이었다.
선배와의 인연이 시작된 동네 공원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수련 잎이 동글게 동글게 뻗어나가는 계절이면, 온통 개구리와 두꺼비 세상이 된다. 새벽 운동을 나간 어느 날, 천둥처럼 왁자지껄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이끌려 연못으로 달려가 본 적이 있다. 오, 세상에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얼굴만 내민 개구리가 연못 가득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서로의 짝을 찾느라 소리주머니를 연신 부풀리는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고 재미나던지.
나의 민화 그림 속에 그날의 연못이 펼쳐졌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날개 달린 요정이 아침을 맞이하며 플루트를불기 시작한다. 활짝 피어난 예쁜연꽃무대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요정의음악회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시끄럽게 악을 쓰며 장난치던 개구리들이 하나 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팔뚝만 한 잉어 가족도 놀러 나왔다.버드나무 가지가 치렁치렁 늘어진 물가에플루트 선율을 따라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선배의삶에서도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확장되어야 향기를 품게 되는지, 그녀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그 본보기를 마주하게 돼서 나는 너무나 기쁘다. 선배의 말 없는 가르침은 앞으로 나의 삶에도 아름답게 스며들 것을 예감하게 된다.제주에서 스친 인연이 일상으로 스며들며,연꽃 같은 은은한 감동이 나의 삶을 물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