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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Sep 15. 2022

가스라이팅의 유혹

 최근 몇 년간 일상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용어는 가스등(Gaslight, 1944년)이라는 영화 제목에서 비롯되었는데, 영화에서 잭이라는 남성은 자신의 아내인 벨라를 지속적으로 속이고 기만함으로써, 벨라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끔 몰아갑니다. 잭은 윗집 여성의 재물을 노리고 그녀를 살해하였는데,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그 집의 전등을 켜야 했습니다. 해당 건물은 가스등을 나눠서 사용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윗집의 전등을 켜면, 잭과 벨라가 거주하고 있는 집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거나 깜박거리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벨라는 이 현상에 의구심을 품고, ‘등이 어두워진 것 같지 않냐’고 의문을 표하지만, 잭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벨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타박합니다. 벨라는 점차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잭에게만 의존하는 무력한 상태로 변해 갑니다.  


  이렇듯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주체성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편의대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최근 이러한 가스라이팅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신도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였음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그리고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심리와 행동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이러한 정보를 공유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졌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이고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대인관계에서의 ‘경계 침범’ 문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보다 평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가정, 학교, 직장을 막론하고 집단주의적 가치 아래, 개인의 선호나 가치, 의견 등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문화적 압력이 상당히 크게 작용해왔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개인의 심리적 경계가 적절하게 설정되지 못하고, 타인의 경계를 무시하거나, 침범하는 행위에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습관적인 행동 패턴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러한 행위가 일상적으로 만연하며, 대부분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에서 자행된다는 점이죠.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주체는 대부분 부모 또는 연인처럼 나에게 애정과 관심, 돌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거나, 직장 상사, 교수 등 나에게 힘과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이익 또는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친밀 관계나 위계 관계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를 지켜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애성 성격(narcissistic personality)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타인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장선으로 인식합니다. 타인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일 뿐,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고유한 특성과 선호, 가치 등을 가진 존재인지는 하등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와중에 더 힘이 세고, 더 매력 있고, 우월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인간관계가 이러한 서열과 위계로 치환되기 때문에, 이들 주변에 있으면 자존감이 깎이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늘 자신의 외모와 옷차림을 지적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러한 지적을 새겨듣고, 조금 더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습관처럼 반복되면, 듣는 사람도 기분이 나쁘고 ‘나한테 왜 이러지? 내가 싫은 건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니,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상대방이 ‘아, 기분이 많이 나빴어?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라고 말하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최소한 상대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진짜로 상대의 외모 변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상처받았다면 미안해.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서로 너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편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어.’라고 진지하게 고민을 얘기하고, 해결책을 찾거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상대가 ‘뭐 그런 걸로 기분 나빠하고 그러냐? 그럼 너도 내 외모 지적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라는 식으로 반응한다면, 이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는 ‘네가 기분 나쁘다고 느끼는 건 타당하지 않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으니, 너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깔려있습니다. 취약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 정말 내가 별것도 아닌 것에 기분 나빠하는 건가? 내가 속이 좁은 건가? 상대방은 괜찮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식으로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자책이 반복되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더더욱 상대방의 말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계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반응해야 했을까?

  “너는 기분이 안 나쁘겠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다고. 너와 나는 다르잖아? 그러니 이런 행동은 자제해줬으면 좋겠다고 진지하게 부탁을 하고 있는 거야.”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함으로써 관계의 경계를 지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경계짓기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내가 이 사람과 계속 건강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짓기에는 엄청난 공포가 따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나를 떠나지 않을까?’, ‘나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을까?’ ‘이보다 좋은 사람, 또는 좋은 기회를 찾을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이러한 공포와 불안은 결핍을 먹고 자랍니다. 이에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저술한 샌디 호치키스(Sandy Hotchkiss)는 ‘우리의 자존감이 흔들거리면, 우리 삶에 무언가 빠진 것이 있다면, 나르시시스트가 기막히게 잘 듣는 해독제를 줄 수 있다.’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마치 타인을 평가할 권한을 가진 것 마냥 행동합니다. 이러한 자신만만한 태도는 때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도 마치 자신이 상대를 간택함으로써 상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나는 눈이 아주 높아. 어지간한 사람은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내가 너를 선택한 건 엄청난 거라고."


  이런 말을 처음 들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어쩐지 눈이 아주 높은 사람의 기준에 내가 꼭 들어맞는 사람이 된 것 같고,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은 얕잡아 보지만, 나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그러나 늘 우열을 가리고, 자신이 모든 선택권과 권한을 가진 것 마냥 행동하는 그 거만함은 곧 나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내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며 칭송하던 그는 점점 더 나의 부족함과 잘못을 지적하며 나의 허물을 들추어냅니다. 계속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의 높고 까다로운 기준에 부합해야 할 것 같고, 나는 뭔가 늘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내 안에 타인의 인정과 애정을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픈 욕구가 크면 클수록, 상대의 선 넘는 행동의 실체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내 인생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러한 무례한 침입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걸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위계가 있는 조직 내에서 실제로 나를 평가할만한 권한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은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가 나의 직장 상사라면 그가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은 나의 업무적 영역에 국한되고, 그가 나의 지도교수라면, 학문적 영역에 국한됩니다. 그 영역을 넘어서까지 자신의 전반적인 태도와 행동, 인성을 지적하고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마치 그러한 전지전능함을 가진 것처럼 굴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수록, 나의 가치를 나르시시스트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샘솟습니다. 결국 나의 가치가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좌지우지됩니다.

  

  나에게 빠진 것을 메꾸기 위해 타인의 애정과 승인에 기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릴 때, 더 이상 그러한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할 때, 우리는 가스라이팅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가 행하는 우열 매기기에서 앞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내 가치를 증명하려기 보다, 내 가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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