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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Feb 21. 2024

음식을 거부하는 마음

'먹지 못하는 여자들' 책 리뷰

해들리 프리먼(Hadely Freeman) 저, 정지인 역

" 거식증은 음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말하려는 시도다."

- 완벽주의의 덫에 걸린 여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공포와 슬픔에 관하여-


 '정신장애의 이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정신장애에 관한 대중 서적을 몇 권 읽었다. '먹지 못하는 여자들'은 저자 보다는 역자때문에 선택한 책이다. 일전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를 재밌게 읽었는데, 영어 원문의 늬앙스를 완벽하게 이해할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정지인 번역가의 단정하면서도 따뜻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먹지 못하는 여자들'까지 읽고 나니, 저자와 별개로 역자의 세계관- 그가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을 엿본 듯한 기분이다.


 책은 거식증에 관한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과 저널리스트로서 거식증에 대해 조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도 책을 쓰는 작업이 저자의 두 자아- 거식증 환자로서의 자아와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아-가 더이상 분열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는 교두보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평생 그녀를 따라다닌 음식과 관련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은 자기 혐오로부터의 탈피 과정을 보여준다.

 

 섭식과 관련해서는 나도 할말이 많다. 20대 초반에는 하루에 사과 하나, 두유 한 개로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자가 저렇게 살이 쪄서 어떡한대" 대학교 1학년 때 친척들 앞에서 외모를 지적하던 엄마의 한마디가 계기였다. 엄마는 내 외모와 체중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를 숨기는 법이 없었다. 몇 달만에 집에 내려가면, 나를 보고서는 첫 마디가 '왜 이렇게 살이 쪘니', '얼굴이 왜 그 모양이니', '뭐 그런 옷을 입고 다니니' 등 이었다. 타인의 말에 쉽게 휘둘리던 나에게 엄마의 말은 절대적 효력을 발휘했다. 엄마에게 들은 말은 곧바로 나를 파고들어 내가 속한 세상을 지배했다. 아직까지도. 작년에 '피부가 엉망진창이네'라는 말을 들은 뒤, 나는 거울 속에서 흙빛으로 변해버린 얼굴을 마주했다. 눈밑의 기미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얼굴의 온갖 잡티들이 거슬려 피부과 시술을 몇날 며칠을 알아봤다. 병원가기 귀찮아서 시술은 받지 않았지만, 왜곡된 렌즈를 걷어 내고 보통의 얼굴로 돌아오는데 반년은 걸린 것 같다.

   

 극단의 절식기를 거쳐 이후 더 오랫동안, 많은 양의 음식을 씹기만 하고 버리기도 했다. 그때 내가 집어삼키고 싶었던 것은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지만, 차마 삼키지 못한 음식물처럼 나는 그 감정을 소화시키는 법을 몰랐다. 누군가와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건 과연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까지 내 뇌에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 하도록 돕는 신경망이 너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게 아닐까. S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직  발달지연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의 작업은 말라붙은 뉴런 말단을 돌돌 펴서 신경망을 연결하고 점화시키는 일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세 자녀의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30년간 이어진 거식증 투병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는 거식증을 향해 열려있던 문이 닫힌 것 같다고 했다. 나 또한 엄마가 된 후로는 극단적인 섭식 습관에서 벗어났다. 자기 직전까지 책 읽어달라, 마사지 해달라, 온몸으로 치대는 아이들에게 "아이고, 요놈들 이제 좀 자라 제발!' 하고 소리치지만,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 혼자 남겨진 고요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이들 덕분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아직 문이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체중이 는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먹는 양을 줄이고, 몸을 평소보다 많이 움직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동시에 '이럴 필요 까지는 없어'라고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 나를 달래고 안심시키는 건강한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다.

 

 거식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불안을 표현해왔다. 어릴 때는 야뇨증과 두통으로, 청소년기에는 교과서의 조사까지 암기하는 강박으로, 성인기에는 계획세우기와 끊임없는 시뮬레이션, 거식과 폭식을 오갔다. "나 기분이 이상해. 힘들어." 이 한마디를 하지 못해 참 먼 길을 돌아왔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좀 안타깝고 지금 이렇게 인간 구실 비슷하게 하고 사는 것이 기특하다. 

 멀쩡한 인간처럼 보이도록 곁을 지켜준 이들이 고맙다. 그들이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줘서 내가 그 세상의 일부로 살 수 있었고, 이제 진짜 내가 그 세상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안다. 멀쩡해 보이는 이들이 그러기 위해 다들 참 수고가 많다는 것을. 가끔 그 위태로운 균열을 서로서로 메워주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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