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연 Sep 15. 2021

소리 수집가 B의 노트

생소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수집합니다.

B는 이제부터 타인에게 자신을 “소리 수집가”로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B에게는 많은 취미가 있지만, B는 음악 감상과 언어 학습에 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B는 무엇인가를 듣는 데에, 특히 소리를 선별하는 데에 조금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그녀에게는 중국어의 “r” 발음과 영어의 “r” 발음과 한국어의 “ㄹ” 발음이 모두 다르게 들린다. 사실 그녀는 한국어의 “ㄹ” 발음은 초성에 위치할 때는 영어의 “r”과 대응하고 종성에 위치할 때에는 영어의 “l”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라면 끓일 거니까 물 받아줘” 같은 일상적인 한 마디에 그런 법칙 따위를 떠올리겠는가? 그녀는 그저 조용히 들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런 맥락도 없이 꺼냈다간 이상한 사람이나 잘난 척하는 사람 취급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글을 쪼개면 문단이 되고, 문단을 쪼개면 문장이 되고, 문장을 쪼개면 단어가 되고, 단어를 쪼개면 음절이 되듯이, 대화도 쪼개고 쪼개다 보면 결국 소리가 된다. 그러니 언어란 소리를 쌓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소리를 쌓아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음악이다. 그래서 B에게는 음악도 하나의 언어이며, 언어도 하나의 음악이다. 따라서 그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B에게 있어 언어는 우선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이다. 모든 언어에는 고유한 음률과 패턴과 높낮이가 있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귀를 그 언어의 주파수에 맞춰야만 한다. 그런데 라디오와 달리 언어의 주파수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수치화되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때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답함도 이겨내야 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하루 이틀 사이에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치 낙숫물이 단단한 돌을 뚫는 것처럼, 여린 꽃의 뿌리가 아스팔트를 뚫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우리의 귀와 뇌는 생각보다 고집스럽지만, 생각보다 유연하기도 하다. 다양한 음악을 듣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음률과 패턴과 높낮이에 귀와 뇌를 노출시켜 그녀의 귀와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B가 좋아하는 중국어 표현 중에 “心有灵犀[심유영서]”라는 표현이 있다.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뜻이다. 灵犀[영서]는 서우, 즉 코뿔소의 뿔이라는 뜻이 있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이 서우의 뿔에는 하얀 무늬가 있는데, 감응感應이 매우 예민하다고 한다. 이 표현을 배운 후 B는 자신의 이마에는 보이지 않는 서우의 뿔이 돋아 있다고 여긴다. 세상을 향해 돋아나 주변과 감응하는 맑고 투명한 뿔이.


B는 생소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을 수집하여 노트에 적어두곤 한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써먹으리라 다짐하면서. 그 노트의 제목은 이렇다: A Collection of Rare and Beautiful Sounds.


B는 생소하고 아름다운 노래들을 수집하고 빛깔별로 분류하여 둔다. 충분히 모여 하나의 색으로 진하게 빛날 때까지. 그 색의 이름은 B도 모른다. 그것은 영혼의 색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고리즘이 쉽게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