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팽나무 Dec 18. 2020

겨울, 여백으로 깊어지다

  겨울은 여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감성에 덧칠했던 색이 빠져나간 자리에 고요히 자리 잡는 공(空), 겨울은 쉼표나 마침표보다 느낌표로 다가온다. 여백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스며든다. 하늘이 비워지고 산이 비워지고 땅이 비워지고 사람이 비워진다. 햇살과 달빛도 야위어간다.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고 빛이 어둠을 포용한다.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아침과 해질 녘 빛의 농도가 같아진다. 


  여백을 만드는 건 바람의 사색이다. 가을의 기운이 쇠락해질 즈음 일어난 바람은 나무를 흔들기 시작한다. 바람은 점점 거세져 빗자루처럼 풍경을 쓸어 모은다. 가을의 화려한 색은 바람에 밀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생의 진리를 찾아 깊은 침묵에 들기도 한다. 가을이 마지막 잎에 작별을 고하면 조금씩 엷어지던 색은 마침내 회색빛 여백으로 남는다. 


  색이 떠난 자리에는 바람의 지문이 남는다. 여백이 늘어남에 따라 숲에는 새 길이 열리고 만물은 초심으로 돌아간다. 겨울은 사람의 깊은 마음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다. 눈에 보이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밝음이 어둠을 품는다. 떠나버린 것에 연연해하는 것도, 오지 않는 것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겨울 안에서는 따뜻함이 된다. 여백이 깃든 마음은 밀침보다 당김에 가까워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하늘과 건물 외벽에 세 들어 사는 가로수 은행나무에도 여백은 서서히 찾아온다. 하루가 다르게 성성해지는 이파리 사이로 서늘한 하늘빛이 파고든다. 채움이 아닌 비움의 계절에는 이파리들도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내어주는 데 관대하다.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빛을 받아들이며 소멸을 꿈꾼다. 사계절을 꿋꿋하게 견딘 은행나무가 마지막 잎을 떨굴 때 나무는 여백의 미를 완성한다.


  지난 늦겨울 황량한 고독 속에서도 가게 앞 은행나무는 너볏했다. 가지 사이에 가득 들어찬 여백을 염려하며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한겨울을 지내느라 거칠고 야윈 가지가 찬바람에 사뭇 떨리기도 했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생명을 품은 나무의 자신감과 느긋함이었다. 비우고 채워야 함의 순리를 터득한 나무는 북풍한설 속에서도 내면을 다지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이른 봄, 나무는 햇살 좋은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했다. 출산을 앞둔 만큼 몸가짐도 단정해 보였다. 이미 몸은 부풀어 올라 산통이 시작되어도 좋은 날을 택하느라 고심했을 지혜가 돋보였다. 나무의 진통이 여백을 흔들던 날, 거친 표피를 뚫고 일제히 솟아오른 새순은 생기로웠다. 그건 겨울 여백이 키운 거룩한 생명이었다. 


  이파리는 연초록의 유년기를 거쳐 발랄한 초록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진초록의 성년기에 접어든 은행나무 이파리는 도시의 거리를 생동감으로 바꾸었다. 회색빛 건조한 건물 벽과 누릿한 여름의 하늘에 세를 들고도 진초록은 기가 죽지 않았다. 여백 없이 열기와 소음으로 빽빽이 들어찬 여름의 대도시는 터질 듯 부풀곤 했다. 숨구멍이 사라진 도시를 지킨 건 은행나무가 일으킨 푸른 바람이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나무는 달라졌다. 흥에 겨운 듯 들떠 보였다. 봄과 여름에 차분하던 나무의 몸짓이 아니었다. 초록이 샛노란 색으로 바뀌기까지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떠들썩했다. 탈피를 거듭하고 한없이 가벼워진 이파리들은 작은 바람에도 술렁이고 수런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허공에 나비 떼의 군무가 펼쳐졌다. 이파리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나둘 어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후 나무는 침잠 속에 들었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는 다시 여백이 깃들었다. 자신을 덮고 있던 모든 걸 떨쳐버리고 본질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무는 세상 이치를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 


  직장인 가게 앞에 턱 하니 버티고 있는 은행나무, 그 변화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도 계절은 수없이 찾아오고 떠나갔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면 겨울이었다. 생활에 매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내게 은행나무는 사계절의 변화를 실감 나게 알려주었다. 팔 년 째 눈을 맞추고 있으니 서로에게 깃든 지 오래이기도 하다. 


  사각의 건물에 갇힌 내가 한 평 공간에서 종종걸음 치는 모습을 나무는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유난히 피곤이 밀려오는 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진초록 잎사귀들이 팔랑팔랑 응원을 보내주었다. 봄에는 생의 아름다움을 여름에는 파릇한 활력을, 가을에는 풍부한 감성을, 그리고 겨울에는 깊은 사색을 전해주던 나무가 올해 또다시 겨울을 맞는다.


  지난겨울, 은행나무는 많이 아팠다. 팔다리를 잘렸기 때문이다. 매연과 소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몸을 키운 나무는 바보처럼 보였다. 적당히 상황에 맞게 자라고 주변의 눈치도 봐야 하건만 제풀에 신이나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으니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선사하는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아이러니한 세상에서 나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무의 생명보다 도시의 미관과 사람을 우선하는 이들이 풍성한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싹둑 잘려 나간 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 그 광경은 참혹했다. 상처 사이로는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나무는 시들시들 앓았다. 도시를 삼키던 바람 소리에 나무의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나무는 며칠을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여백이 절정에 이르자 변신을 거듭한 겨울은 세상을 하얗게 바꾸어 놓았다. 소복하게 내린 눈이 은행나무의 상처를 보듬어 안았다. 여백을 파고든 눈의 결정체 속에서 나무는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 겨울은 많은 걸 파괴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안에 소생의 기운을 품고 있음을 다시 보았다. 직설적인 화법으로는 낳을 수 없는 은근함, 생각을 거듭하고 가슴을 열어야만 피어나는 따사로움, 겨울의 여백은 느낌표였다. 


  이듬해 봄, 더 말간 연초록 이파리 사이로 햇빛이 찬란했다. 은행나무가 사철 푸른빛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더라면 겨울철 의연하고 담대한 기상을 엿볼 수 없었으리라. 스스로 몸을 비우고 가벼워지며 여백을 만듦으로써 더 깊어지는 생의 아름다움을 나무는 몸으로 보여주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을 맞은 나무는 며칠째 바람을 타고 있다. 마음속 찌꺼기까지 죄다 비우는 모양이다. 흔들리지만 흔들리지 않는, 여백이 붙들고 있는 나무가 의연하다. 빈 가지와 눈을 맞추는 동안 한 뼘도 될 것 같지 않은 내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건 무엇 때문인가. 문득, 결이 촘촘한 바람 한줄기 가슴에 지그시 들여놓고 싶은 날이다.      

                                         





















작가의 이전글 초록의 도(道)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