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표지 : 히가시노 게이고,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중에서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기까지 불과 다섯 걸음, 다섯 걸음이었다. 그야말로 폭포수를 방불케 하는 빗줄기. 그 속에서 눈에 띈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재능보다 의지를 칭찬해 주라는 글귀였다. 화선지에 세필로 쓴 서예작품 같은 그 글귀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언제 찢길지 모를 아슬아슬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폭포수 같은 비가 재능이라면 그 속으로 달려가는 건 의지일까. 하지만 오늘 같은 재능이라면 어떤 의지로도 물길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사람에게는 왕왕,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제2, 제3의 자아가 있는 건 아닐까.
흰색 벤츠에서 내린 곱슬머리 손님은 오전 11시쯤 카페로 들어섰다. 그는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자기가 속한 로터리클럽 이야기를 종종 꺼냈다. 눈이 풀린 날이 잦았고 숙취로 번들거리는 얼굴에서는 나의 일부를 의뢰할만한 신뢰감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가 상당한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는 평소 오전 9시쯤 카페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지금의 방문은 확실한 의외다.
"오전 출근을 못했어요. 빗길에 멈춘 차들 때문에. 아, 시원한 라떼로 부탁합니다."
그는 커피잔을 받아 들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우유가 하얗게 스민 큐브 얼음들이 드러났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앞에 물이 고인걸 뻔히 보고도 들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멈추든가 뒤로 물러나던가 해야지."
혼잣말처럼 들렸지만 가벼운 응대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죠. 아니면 생각할 틈도 없이 진입해 버렸거나."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바깥쪽을 쳐다보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맹렬한 기세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고 차에서 탈출해 버리니 도로가 다 마비가 되잖아, 쯧쯧."
나는 말없이 거의 비어버린 테이크아웃잔에 우유와 남은 샷을 부어주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잘 먹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가 빠른 걸음으로 흰색 벤츠에 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건넨 좋은 하루라는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작은 하천은 집중호우에 속절없이 범람했다. 논이 물에 잠겼고 자라난 벼들이 끝부분만 간신히 드러나 있어 멀리서 보면 논인지 잔디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저지대에 넘쳐난 물이 모였고, 굴다리를 지나던 차들이 우회하고 돌아 나올 길을 찾느라 그렇잖아도 좁은 시골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서산, 당진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천안, 아산과 평택 일부 학교는 휴업해 교직원들만 학교에 나왔다. 그들도 혼잡스러운 출근길을 헤쳐오느라 학교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반쯤 질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노인주간보호센터도, 새로 연 지인의 백반집도 물에 잠겼다는 얘길 들었다. 정전이 되면 준비해 둔 식자재며 밑반찬들이 더운 날씨와 습기에 상하기 시작한다며 울상이었다. 카페 옆 국밥집은 하루 장사를 쉬기로 한 듯했고, 이런 때에 무사히 카페에 도착해 두터운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처럼 느껴졌다. 집사람은 새벽까지 쏟아지는 비를 보더니 일찌감치 나설 마음을 접었고 병원에 나가있는 학생들 실습지도를 줌회의로 전환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는 줌으로 커피를 팔 수 없으니 일단 나서보겠다고 한 게 아침의 대화였다. 마침 발을 동동 구르던 고등학생 딸을 학교 정문에 내려주고 평소 다니던 길로 들어섰다. 국제대교를 지날 때 황토색으로 물든 안성천을 보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수위가 불어난 안성천의 파도는 언제 갑자기 43번 국도를 덮칠지 알 수 없었다.
방학을 앞두고 아이들은 들떠 보였다. 1학기 진도를 마친 과목들은 자습으로 진행되었고 고등학생이 된 딸은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성적표에 흥분과 설렘을 표현했다. 등수가 나뉘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등수에 위로받고 뿌듯해하고, 누군가는 상처받고 좌절하겠지만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는 등수로 표현하지 않아도 얼마간은 짐작하기 마련이니까. 다만 자신의 위치가 극단값에 있다는 사실은 때로 어지럼증을 일으키곤 한다. 인간은 자신이 평범하다고, 자신을 둘러싼 여타의 존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확신으로 바뀔 때 안도감을 느낀다.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 서로가 다른 존재임을 느낄 때 안도감을 느끼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등수는 몇 가지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사소한 차이를 돋보기로 확대해 마치 커다란 우열이 서로 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우리가 안도감을 느끼는 영역을 좁고 가느다란 문을 통과해야 가능한 것으로 조형하는 역할도 한다. 무의식 중에 누군가를 월등한 존재라고, 또 다른 누군가를 모자란 존재라고 여기게끔 한다. 누군가는 타인일 수도 자신일 수도 있다. 학업에서 등수나 등급을 매기는 것은 의도된 면도 없지 않다. 편안할 때보다 불안할 때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미 평범함을 충분히 갖춘 존재에게 다시금 평범함이라는 타이틀을 위해 노력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자극하는 것. 어지럼증은 그런 때에 발생한다. 가고자 했던 방향과 실제로 움직인 방향과의 괴리.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위치와 실제로 존재했던 위치와의 차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어떤 지표들에 의도된 확대된 구분.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눈을 감았을 때도 머릿속에 북소리가 울리고, 마치 지구와 상대속도를 가진 존재처럼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빗발치는 폭우 속에서 길을 나서는 것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빗발치는 폭우를 보며 집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 역시도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불어난 강물에 잠긴 도로를 보면서도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 불어난 강물에 잠긴 도로를 보며 멈춰 선 것 역시 달리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퍼내며 꺼진 냉장고에 들어있던 밑반찬과 식자재들을 어딘가로 옮겨두는 것과 일단 물러서는 것 역시 그 순간 그것이 최선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하던 결과도 실망스러운 결과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수많은 선택의 모양들, 의지의 산물들이 가진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과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를 두고 비판하는 일은 쉽지만 허탈하다. 훈수 두는 이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특별한 수를 찾아낼 뿐, 사건의 중심에 서면 모두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결과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좋은 쪽이었든 나쁜 쪽이었든 후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든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도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순간에 놓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