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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지운 밤

by 작가 전우형

송곳 같은 무지개였다. 하나하나의 색깔들이 눈부실만큼 선명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바다의 날카로움을 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날의 비는 이는 구름을 옆으로 밀어낼 만큼 활력이 넘쳤다. 대기에 흩뿌리는 소낙비의 행렬은 한바탕 한풀이라도 하듯 사방으로 소용돌이쳤다. 너는 무엇을 후회하고 고민하더냐고, 무지개는 물었다. 우리의 색은 뒤엉킨 적이 없었다. 손은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늘 놓여있었다. 맑은 하늘이었고 평온했다. 그런 세상에 심장을 두고 싶었다. 피는 무지개가 닿은 땅을 바라보며 나는 반대로 걸었다.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이는 무력하다.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력했다. 새들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매미가 울었고 어스름이 졌다. 구름은 가까이 있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금세 말랐다. 어떤 일은 흔적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끝난다. 어쩌면 만남과 헤어짐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길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앞차를 추월하지 않고 뒤따라만 갔다. 미련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는 일은. 반가운 모습들이 눈앞을 오갔다. 현재를 사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숙제는 결국 마지막 날에야 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현재로 돌아온다. 사랑하는 일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다. 떨어지기 쉬운 난간에 펜스를 세우는 일처럼, 인간은 종종 도망치고, 붙잡는다. 늦은 밤 가로등이 비추는 곳으로 걷는다. 엄마는 딸의 귀가를 기다리며 잠을 설친다. 감기 기운을 떨치려 진통해열제를 먹는다. 맑은 코를 훌쩍이며 지나온 한 주를 떠올린다. 새벽 일찍 일어나는 날이 많았다. 노트북을 열고 급한 일을 처리하다 밥을 안친다. 쌓인 설거지거리 중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치운다. 한두 가지 반찬거리를 해둔다. 잠에서 하나둘 깨어나는 아이들을 반긴다. 눈을 반쯤 감은채 널어둔 빨래처럼 흐느적거리는 생명체들. 아침의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새벽기도 같다.


멀리 있는 이를 생각한다. 가까이 있는 이의 숨소리를 듣는다. 가만히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 나도 보조를 맞춘다. 들숨에 들숨을, 날숨에 날숨을. 이 호흡이 서로의 평안을 매듭지을 수 있다면. 무사히 귀가한 딸을 반긴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내일 몇 시에 일어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풍기 소리가 멎었다. 탁탁탁.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평범하고 평범한 밤을 여는 노크소리다. 밤의 시작을 미루며 뒤척인다. 숨소리는 다시 차분해진다. 아주 오래된 일처럼 오늘 밤은 평온하다. 멀리 있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잔잔하다. 지나치듯 인사를 건넸다. 사소한 일들 뿐이었다. 서로를 흔들만한 일은 없었다. 역시,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는 일은 무력하다. 생각으로는 마음을 돌릴 수 없다. 날아가는 새의 방향을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자랑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귀뚜라미를 잡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울지 않는 밤은 완성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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