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 조금씩 고쳐 쓰는 시의 일부
8월 마지막주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저녁 8시 반쯤 카페를 나서 국제대교 쪽으로 좌회전을 하는데 멀리 경광등이 반짝이며 이동하는 일단의 차량들이 보였다. 사이렌도 울리지 않은 채 고요히, 그 불빛들은 다만 내가 가려는 쪽으로 줄지어 이동할 뿐이었다. 소방차나 구급차, 경찰차, 그 어느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 실루엣들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거니와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병원 입구로 들어서는 아이처럼 움직임도 굼떠 보였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들 옆을 지나치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섰을 보인 것은 차량에 옆면과 뒷면에 쓰인 '소방지휘'라는 글씨였다. 그렇구나. 없을 거라 단정 짓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 섞인 짧은 단어를 내뱉었다. 그들을 추월해 국제대교로 진입하는데 저 앞으로 이번에는 확실히 경찰차와 소방차의 그것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머리를 맞대듯 서로 모여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갓길에 세워진 차량들 옆으로 몇몇 사람이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밤이라 더 어두워 보이는 그들의 그림자는 그래서인지 더 어두컴컴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들이 응시하는 곳에 무엇이 있을까, 짧은 질문을 머릿속으로 던지려는 찰나, 반대 차선에서 소방차 한 대가 고속단정을 예인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레 맞춰지는 퍼즐 조각을 애써 흐트러트리며 집에 도착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곳에는 녹색 펜스가 높게 설치돼 있었다. 어젯밤 대원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곳이었다.
8월이 가고 9월이 왔다. 2025년도 넉 달밖에 남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는 간간이 선선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더위가 물러갔다고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뜨거움의 질감이 확연히 다르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결국 이렇게 지나가는 걸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흔한 경구가 떠오른다. 다시 퇴근길에 국제대교를 건너다 오른쪽을 보았을 때 천변으로 황금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모진 여름을 뚫고 자라난 벼들은 이제 수확을 앞두고 있고 '결실'이라는 두 글자가 농부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고 있을까.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게 어렵고도 일방적이라 하여도 나는 자연스레 어떤 이의 심정을 그려보게 된다. 좋든 싫든 그것이 나의 한계라면 한계다. 하지만 자연에 대해, 다른 수식어란 애초부터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럽다는 단어의 의미처럼 억지로 꾸미거나 순리에 어긋남이 없는, 힘들이거나 애쓰지 않아도 당연하고 저절로 이루어진 상태. 그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 생각, 말투.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런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존재 자체로서도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여유와 가치,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 그리하여 억지로 만들어내지도, 또 억지로 지켜내지도 않아도 되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오고 감. 그때 유리창에 붙은 갈색 사마귀를 보며 잡념은 사그라들었고, 나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속도를 줄였다. 그제야 볼 수 있었던 하늘. 그리고 높고 푸른 하늘을 곱게 펼쳐놓은 것 같은 양떼구름. 어제와 같으면서도 완벽히 다른 모습. 자연은 그렇게 서서히, 확실하게 변해간다.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 않지만 매 순간이 다르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티 내지 않고 해낸다.
그런 자연은 때가 늦음을 두고 서글퍼하던 나를 가르치는 듯했다. 그즈음 나는 기다림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기다림은 시간을 촘촘히 바느질해 나의 모든 감각에 붙여 두었다. 기대와 갈망, 실망을 번갈아가며 마음을 어떤 순간에 못 박아두었다. 자연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매 순간 차곡차곡 이루어지는 것들에 감사하고 섬세해질 수 있다면. 나의 부족은 그런 데서 비롯된다고, 자연은 말하지 않았다. 이루어진 만큼이 원래 네가 누려야 할 몫이었다고 불어 가는 바람을 통해 전해주었을 뿐.
내게 8월은 조급했고 그래서 달려가고픈 계절로 남았다. 속도를 내지 못한 나를 탓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지에 골몰하느라 충분히 누리던 것들조차 놓치곤 했다. 빠르게 달리려 할수록 누릴 수 있는 순간들마저 더 빨리 멀어진다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9월은 내게 어떤 계절로 남을까. 그날의 달은 예전보다 시린 빛으로 차올랐고 한없이 차분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그 순간 내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사랑은 그토록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좋은 것들을 이미 가졌는지 알아차린 사람에게는.
나는 누군가가 보았을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그에게도 저 황금빛 들판은 오늘처럼 아름다웠을까. 지나칠 뿐인 나를 향해 정성을 다해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 같은 계절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었다면. 차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 속에서 작고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행복하다는 말의 이면에는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이 숨어있다. 그의 하루가 따뜻하길 바라는 마음을 뒤늦게 가져보았다. 내겐 마지막이 아니었을 8월의 어느 한 밤이 그에게는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에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더 어두운 부분과 덜 어두운 부분을 가려내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고, 덕분에 나는 9월에 서있다. 이미 9월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기분이 들지만, 그마저도 오가는 것들 사이에 서서 손 흔들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