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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떨어지는 오후처럼

모두들 Welcome!

by 작가 전우형

오랜만에 날씨가 맑았고 그래서 카페 안으로 햇빛이 들이쳤다. 카페 입구 통유리문에는 곰돌이가 손을 흔드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나는 늘 카페 안쪽에서 보았으므로 단축키를 잘못 눌렀을 때처럼 앞뒤가 뒤바뀌거나 나도 모르는 새 키보드 입력 모드가 바뀌어 한글이나 영어 모양을 한 출처불명의 글자 같은 이상한 문구만 보아오다가 우연히 바닥에 비친 그림자에 제대로 'Welcome!'이라고 적힌 것을 발견하고는, 종일 고요하기만 했던 카페가 나를 반겨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인지 우울하던 기분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개천절부터 시작된 긴 연휴도 어느덧 절반이 지났고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도 어제까지였던 걸 보면 실질적인 추석은 지나가버린 듯한데 많은 학교들이 한글날과 주말 사이에 낀 10월 10일 금요일을 재량휴업일로 정했고 덕분에 슬하의 세 자녀 역시 봄방학쯤 되는 분위기로 이번 주를 보내고 있다. 고등학생인 첫째만 벌써부터 마음이 급한지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책상에 앉아 교과서며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맘때 공부는 어떻게 했어?라고 묻는 첫째에게 나는 딱히 조언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공부가 왜 이렇게 하기 싫지?라고 묻는 첫째에게 그럴 땐 하지 말고 놀아,라고 했다가, 그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는데?라고 되묻는 첫째에게 한 만큼만 얻으면 되지,라고 답했다가 원망이 담긴 눈총을 맞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통쾌했던 것이, 아마 나는 그맘때의 고민 같은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불 건너 물 구경 같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러므로 손님이 없는 카페에 앉아 유일한 손님인 것처럼 나를 반겨주는 통유리창 곰돌이 경의 Welcome!이라는 인사를 받았을 때 너 거기 그렇게 앉아 있어도 괜찮겠어? 그래가지고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어?라는 질문 형식을 띤 핀잔 혹은 잔소리를 바늘과 실로 단단하게 기워 귀에 걸어두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래나 저래나 때로는 아무 말 없는 에어컨 바람보다 무슨 말이라도 던지는 스티커가 심정적으로 반가운 모양으로,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MMPI 질문지에서 '나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 같은 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기기만은 아니었을까 고민하면서도, 대부분의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아, 혼자 있고 싶다'는 바람을 투명 종이 같은 마음에 막 휘갈겨 쓰고 있는 걸 보면 마냥 거짓말이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그래도 좋아하는 한두 사람과는 말을 섞고 싶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고, 그 아주 작은 일부인 내가 오늘 같은 고요한 풍경에서는 실없이 외로움을 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쯤 처음으로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른 봄날 같은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 듯도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온기가 따뜻하게 나를 반겼다. 적당히 눈높이를 낮춘 태양이 은행나무 끝에 걸려 있었다. 버스 몇 대가 연달아 지나쳤고 끝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의 일부가 투명하게 빛났다. 길 건너 고양이 두 마리가 양지에 나와 몸을 비비고 있었다. 다투는 듯하면서도 살기를 내뿜지 않는 모습이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아이들은 매 순간 사소한 일로 다투면서도 서로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옆에 있을 때는 귀찮아하면서도 보이지 않으면 찾는다. 의지가 된다는 건 어느 가을 오후에 찾아든 봄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친근해져 가는 사이처럼 한껏 아파하고 또 아파하다가 문득 돌아보면 이만큼 걸어와 있고 매 순간 밀어내기만 하는 것 같았던 시간들이 실은 서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던 건 아니었을까. 빛이 떨어지는 오후처럼 그림자를 늘어트린 내가 있고, 차분한 바람에 손을 흔드는 은행잎이 있다. 돌아오는 길도 안전하길. 그렇게 은행잎은 내게, 혹은 스스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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