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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하루

벌써 10월

by 작가 전우형

벌써 9월이 지났고 어제, 그러니까 벌써 이틀 전이 되어버린 어제는 어여쁜 초승달이 초저녁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추석을 일주일 하고도 하루 앞둔 오늘, 달은 이미 명절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인터넷 쇼핑 앱을 열고 캐러멜 시럽을 주문했다. 오늘은, 그러니까 이제 막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은, 구름이 맑게 드리우면서도 화사한 하루였다. 7시 52분에 아내는 "7시에 알람을 맞춰뒀는데 왜 7시 52분이지?"라고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고 토스트에 꿀과 크림치즈를 발라 입에 넣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거 어때? 괜찮아?" 하며 묻는 아내에게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 티 안 나지?"하고 까만 원피스 치맛단을 근심스레 들어 보일 때는 "괜찮아"라고 답도 해주었다. 8시 반쯤 집을 나서는 아내에게 속옷바람으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넨 후 안방 문을 닫고 침대에 다시 누워서 체외수정에 실패한 부부가 조카에게 난자 기부를 요청하는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근 위축증에 걸려 몸이 굳어가는 아이의 간병인으로 일하게 된 작가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다가 일어나 빨래를 돌리러 갔다. 세탁기에 이미 들어 있던 빨래에다 빨래통에 들어있던 빨래를 합치니 한 번에 돌릴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일부를 꺼내고 다이얼을 돌려 '일반세탁'에 맞춘 다음 작동 버튼을 눌렀다. 세제 칸에 드럼세탁기용 세제를 넣고 섬유유연제 란에 섬유유연제를 넣은 다음 건조기에 방치돼 있던 빨래를 꺼내 탁자 위에 쏟았다. 건조대의 빨래를 모두 걷어와 손에 집히는 대로 하나씩 개비기 시작했다. 빨래는 걷은 다음 바로 갤 때가 가장 쉽고 기분도 좋다. 축축한 감이 느껴지는 빨래 몇 개를 다시 건조대에 널고 베란다 바닥을 닦았다. 개와 고양이가 싼 오줌이 굳은 타일은 악취도 악취지만 몇 번을 문질러 닦아도 찜찜한 기운이 남는다는 게 더 끔찍했다. 한 움큼 나온 물티슈를 종량제봉투에 담아 묶어 현관 밖에 내놓은 다음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손에서는 비누 냄새만 났지만 어쩐지 코에서는 다른 것도 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날이 더운 듯해 아예 샤워를 하고 10kg 쌀포대 하나를 뜯어 쌀통에 부었다. 지난번에 청소하다가 발견한 프라모델 부품들의 짝을 맞추며 잠시 생각을 함께 지워내다가 아이들에게 짜파게티를 먹을지를 물었다. 첫째와 셋째는 배홍동을 직접 해 먹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나와 둘째는 짜파게티를 먹기로 했다. 냄비 두 개에 물을 끓이고 비빔면을 식힐 채반을 꺼냈다. 첫째에게 채반에 면을 부어 주고 찬물로 식히라고 한 다음, 나는 짜파게티에 올리고당을 살짝 두르고 소스를 비볐다. 김치와 사과, 후식으로 생크림요구르트를 곁들여 먹고 설거지는 크고 양념이 많이 묻은 것들만 대강 헹궈낸 후 둘째와 막내에게 맡겼다. 선반에 건조된 식기들을 정리하고 음식 쓰레기와 아까 현관에 내어둔 종량제 봉투를 버리고 오자 아까 돌려둔 세탁기에서 세탁 완료 알림음이 들렸다. 첫째에게 건조기에 넣을 것과 건조대에 널을 것을 분류해 달라고 한 뒤 이를 닦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 뉴스를 잠시 보다가 전직 대통령 이야기가 나와서 끄고 오전 내 실로폰을 두드리고 있는 막내의 연주를 들었다. 12월 학교에서 작은 음악회가 있는데 리코더는 어려워서 실로폰으로 참가하려는데 지원자가 많아서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며, 막내는 힘든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렇구나. 취지는 이해하지만 실로폰 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엔 귀도 정신도 조금 고단해지려고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침대에 잠시 눕고 이내 일어나 수염을 깎았다. 이런 때는 내가 나가 주는 게 맞다는 걸 이제는 안다. 가족이라고 늘 같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마침 충전해 둔 차를 옮겨두어야 했고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눈에 이물감이 들어 힘들어하는 아내를 데리러 갈 용무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 갈 요량으로 팽성에 있는 카페로 갔다. 먼저 온 권사님 두 분과 인사를 한 뒤 커피를 내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고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폈다.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조금씩 일고 있었다. 마침 등장한 지인으로부터 특수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한 전시회 이야기를 잠시 듣다가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 분리수거 장소에 내어 놓고 길을 나섰다. 아내에게 줄 아이스커피도 한잔 담아 호서대에 도착하자 오후 3시 40분이 조금 넘어 있었다. 걸려온 아내의 전화를 받으며 바로 내려올지 연구실로 올라갈지를 물었다. 간호대 건물 옆 교직원 회관 주차장에 주차한 다음 나무 밑에 세워둔 아내의 차를 새똥이나 나무 진액이 떨어지지 않을 만한 자리로 옮겼다. 아이스커피를 마셔보라고 아내에게 내밀자 아내는 한 모금 들이켠 다음 써, 하고 말했다. 곧 잔은 비었고 김치 수육 재료를 사러 가까운 동네 마트에 들렀다. 우유와 안에 국물이 든 냉동 만두, 빵, 수육용 앞다리살, 할인 바코드가 붙은 목살을 사서 집으로 갔다. 막내는 아까와 같은 복장과 자세로 실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굴이 아까보다 더 초췌해 보여 물으니 그래도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났다고 했다. 구름이 짙어졌고 잠시 노을이 물들다 해가 졌다. 빠른 속도로 여름이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고 7시쯤 침대에 눕자 노곤함이 몰려왔다. 옆에 누운 아내가 "올리브 영 한번 다녀와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고 "10분만 쉬었다 다녀올까? 옆에 안경점도 다녀오면 되겠다. 코가 한쪽이 아프다면서."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며 돌아누웠다. 눈을 떠보니 밤 11시였다. 목이 타서 물 마시러 가는데 아내가 혼곤한 목소리로 "진짜 잘 자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네"하고 말하는데 열린 베란다 문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밖에서 탁, 타닥 새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에서 깬 걸 어느 틈에 알아차렸는지 고양이가 와서 비빈다. 또 발정이 났는지 밤만 되면 울어서 걱정이다. 교회 앞 화분에 버려져 있던 새끼들을 구조해 온 게 재작년 5월 31일이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던 다섯 마리 새끼 고양이들에게는 쿠키, 그레이, 모카, 치즈, 라떼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오가는 카페 손님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쿠키는 죽고 그레이는 좋은 주인을 만나 입양되었으며 모카는 집으로 데려왔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치즈와 라떼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다 치즈가 먼저, 그리고 라떼가 밤중에 우리를 탈출해 사라졌다. 벌써 한참 지난 일이 되었고, 또 생각해 보면 엊그제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라떼가 사라지던 날, 오늘처럼 밤이 차갑고 가을비가 내렸다. 나는 무엇을 보냈고, 무엇을 보내지 못했나. 9월이 깊어가는 밤, 가을도 깊어가는 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계절과 지나온 하루, 그리고 함께했던 인연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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