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끝났지만, 프로듀스101 시리즈로 탄생한 아이돌 그룹 3팀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다. 왜? 기획사가 조합해서 내놓은 그룹이 아니라, 내 지분이 들어가 있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창작물에 애정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100% 시청자 투표로 팀이 꾸려지는 프듀 시리즈는 아이돌 문화의 변곡점이 되었다. 노래나 춤이 아닌 팬을 모으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 되었다는 것, 팬 스스로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기획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는 아이돌 문화를 떠나 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시대, co-creating의 시대다. 어느 날 갑자기 출몰할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영웅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시대다.
이것은 브랜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기업이 기획하고 제작해서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구매하던 일방향 시대는 끝났다. 이제 시장은 무한한 쌍방향, 또는 다자간 커뮤니케이션으로 움직인다. 소비자가 함께 하지 않는 브랜드가 아이코닉한 브랜드로 우뚝 서기는 힘들다.
영국의 유아식 브랜드, 엘라스키친(Ella’s Kitchen). 이 브랜드는 불과 설립 15년만에 글로벌 식품기업의 브랜드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다. 전통 있는 브랜드를 선호하는 영국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엘라스키친이 급성장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엄마들이 원하는 제품, 엄마들이 원하는 제형, 엄마들이 원하는 패키지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엘라스키친은 엄마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엘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영국 소녀 엘라는 편식이 심했다. 보통의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참 힘든 아이구나’ 포기하고 말지만 엘라의 아빠인 폴은 그렇지 않았다. 엘라에게 건강한 식습관을 심어주고 싶었던 아빠는 저명한 영양학자, 아동심리학자들과 함께 100% 유기농 유아식 브랜드를 만든다. 그것이 엘라스키친이다.
재미있는가? 솔직히 여기까지는 평범한 이야기다. 어느 브랜드도 이 정도의 브랜드 스토리는 갖고 있다. 그런데 엘라스키친이 특별해진 이유는 브랜드를 시작할 때 영양학자와 아동심리학자 외에 공동개발자 그룹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의 먹거리에 관심이 많은 300명의 엄마들이었다.
엘라스키친은 온라인에 300명 엄마들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으로 브랜드를 시작했다. 300명의 엄마들이 서로 친해져서 일상사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집중했다. 엄마들은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아이 키우는 어려움을 서로 위로했다. 단순히 기업용 커뮤니티가 아니라, 엄마들이 서로를 의지하는 커뮤니티로 자리잡게 되었다.
엘라스키친은 이 커뮤니티를 자신들의 마음대로 주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다. “아이에게 간식을 먹일 때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아이가 어떤 간식을 제일 좋아하나요?”, “여행갈 때 꼭 챙기는 간식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들을 커뮤니티 멤버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올리고 답을 기다렸다.
흥미로운 답변이 있었다. 브레드스틱이었다. 바삭바삭한 브레드스틱을 아기들도 좋아하고, 아기들이 직접 쥐고 먹을 수 있으니 엄마들도 편해서 좋다는 것. 그런데 시중 브레드스틱은 유아 전용이 거의 없어 과도한 소금 섭취가 걱정된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엘라스키친의 주력 제품들은 신선한 유기농 과일을 베이스로 한다. 그러나 엘라스키친은 엄마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탕, 소금, 인공첨가물이 없는 아기용 브레드스틱을 출시했다. 그리고 이 제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엘라스키친 사례를 소개하면 ‘우리도 비슷한 커뮤니티를 운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커뮤니티를 들어가보면 개점휴업 상태다. 기업의 홍보성 글이 몇 개 있을 뿐 멤버들이 자의적으로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기업이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목적이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이다. 기업 홍보를 위한 수단,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우리는 얼마나 참견하기 좋아하고,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24시간 늘 오픈되어 있는 찻집처럼, 브랜드커뮤니티는 아무 때나 심심할 때면 잠깐 들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통적인 정량 조사나 정성 조사를 뛰어 넘는 깊이 있는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곳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입장이 아닌 멤버의 입장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기업 홍보용 커뮤니티 같은 곳은 아무도 가지 않는다. 진짜 멤버들끼리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의 커뮤니티를 조성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 멤버들을 공동개발자로 존중하는 마음이다. 팬덤을 공동개발자로 잘 운영하는 브랜드 중 레고가 있다. 레고는 원래 “우리가 요구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수용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이 있을 정도로 꽉 막혀 있는 회사였다. 그랬던 레고가 “우리는 사용자 커뮤니티를 통해 혁신을 이루고 있다”며 태도를 바꾸었다. 어린이들의 단순한 장난감이 어마어마한 성인 팬덤을 거느린 브랜드가 되기까지에는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레고팬들의 아이디어 공유가 있었다.
어디든 무엇이든 폐쇄에는 정체와 후퇴가 따른다. 공유와 개방에는 변화와 혁신이 따른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너무나 금방 진부화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브랜드는 고객과 공유되어야 하고 그 모든 과정이 개방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대의 감성과 니즈를 따라잡기 위한 길이기도 하고, 고객들의 애착을 높여 팬을 만드는 길이기도 한다.
고객에게 브랜드를 개방하라. 어쩌면 지금의 브랜드는 그저 플랫폼일지도 모른다. 브랜드의 임무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그들의 메시지를 증폭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팬들은 더 이상 스타를 추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스타를 키운다. 그래서 스스로를 ‘앰’ 즉, ‘애미’라고 부른다. 소비자를 소비자에 머물게 하지 마라. 소비자가 아니다, 공동개발자다. 공동개발자가 아니다, 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