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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brosia Sep 09. 2020

이 영광을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오빠들에게 돌립니다.

삼수는 없다! 나의 브런치 재수기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두 편의 소설을 썼다.
당시 내 인생을 홀라당 바쳐 사랑했던 ‘뉴 키즈 온 더 블록’ 멤버들과의 로맨스를 그린, 이른바 팬픽 소설이었다. (물론 5명의 멤버들 모두 마성의 주인공인 나와 사랑에 빠진다.) 사실 그때는  ‘팬픽’이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HOT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 소설이 등장하고 귀여니의 ‘인소’(인터넷 소설)가 인기를 끈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선 게로구나.”


 흔한 중고생 노트에 연필로 써내려간 내 소설은 우리 반에서 다른 반으로, 우리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점차 퍼져나가서 우리 동네 3개 여중을 순회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에피소드를 원하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나는 외고 시험 준비 따위는 까맣게 잊고 낮이나 밤이나 집필 활동에 매진했다. 그 결과 외고 시험에 똑 떨어지고 그저 그런 동네 여고에 배정받았지만,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더 낫다며 정신 승리에 성공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성애 장면의 묘사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할리퀸 소설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 당시 엄마 아빠 몰래 빌려보았던 일련의 영화들의 잔상도 컸다.
뒤라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화이트 수트를 입은 양가휘와 밀집모자를 쓴 제인 마치가 열연을 펼친 <연인>, 감각적인 영상과 미키 루크의 눈웃음이 인상적인 <나인 하프 위크>류의 영화가 나의 교과서가 되었다. ‘지구촌 영상음악’에서 틀어주는 뮤직 비디오 또한 소녀의 상상력을 한껏 키워주는 참고서 역할을 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에서 갈아탄 나의 새로운 오빠 ‘마키 마크’(Mark Walberg)의 “Good Vibrations” 뮤직 비디오를 보며 할리퀸에서 글로 배운 장면들을 시각화한 후, 마음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미지들을 적는다. 쉬는 시간이면 홀로 이어폰을 꽂고 마돈나의 “Justify my love”(노래의 8할이 신음소리로 이루어진)를 들으며 나의 19금 작품 세계에 푹 몰입하곤 했다.


당시 지갑에 고이 넣고 다니던 내 뮤즈(?)의 사진


 일찌감치 수포자가 되었고 딱히 진로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던 나는 내 수능점수로 가장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던 국문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전공수업의 하나였던 ‘소설 창작’ 시간에 액자식 구성의 소설 쓰기가 과제로 주어졌다. 당시 교수님은 우리 시대 젊은 지식인의 아이콘 같았던 분으로 베스트셀러 소설을 낸 적도 있는 작가였다. 다른 어떤 전공 수업 때보다 열심히 과제를 해서 제출했다. 사실 그때 교수님께서 내 소설에 대해 칭찬해주셨던 정확한 워딩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나의 동창 한 명이 또렷하게 그 말을 복기시켜주었다.


소설 창작 시간에 류 교수가 니 글을 극찬하며 공모전에 내보내면 좋을, 몇 줄 안에 승패를 볼 만한 글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연애한다고 학교도 거의 빼먹고 다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디 가서 국문과 출신이라고 말하기 사실 부끄럽지만, 단연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해외를 떠돌았던 20대, 그리고 결혼 후 직장 생활이다 임신과 출산이다 거세게 흘러가는 인생의 급류에 휩쓸려 지금까지 글쓰기를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올해 초 심심풀이로 적었던 나의 한 여름밤의 꿈같은 이야기를 읽고 친구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무척 컸다. ‘브런치’라는 매체를 알게 된 것도 그렇게 나를 격려해준 한 친구 덕분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야.
너는 꼭 글을 써야 해.


(여기까지 적다 보니 다시 한번 내가 인생을 헛살진 않았구나 싶어 가슴이 벅차다. 진심으로 고맙다 친구들아!)

 그렇게 나는 옛 영화로운 기억들과 고슴도치 엄마와 다를 바 없는 친구들의 전폭적인 격려 속에 브런치 작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큰 고민 없이 떠오르는 별명 하나를 작가 이름으로 쓰윽 적고, 작가 소개 및 앞으로의 작품 활동도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유머와 위트 넘치는 에세이도 쓰고, 아줌마들의 가슴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는 39금 소설도 적어야지. 내가 좋아하는 팝송들을 엮어서 음악 칼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작가 선정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며 나는 벌써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아니 중원에 아무리 고수가 많다한들 나의 내공만 튼튼했다면 신참 검객으로 출발할 수 있었을 테지만, 중고등학교 때 팬픽 쓰던 실력만 믿고 덜컥 덤비기에 브런치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흑. 떨어트리더라도 도대체 이유라도 좀 알려주시고 떨어트리시지. 한창 열창하던 중에 다짜고짜 땡! 소리를 받은 전국노래자랑 출연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뭐라도 된 듯 한껏 펼쳤던 망상들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 일단은 글 쓰는 근육을 좀 붙여야겠다.
이건 마치 평생 운동 한 번 안 하다가 헬스장 처음 들어가서 데드리프트 하겠다고 덤빈 꼴이나 마찬가지지.

내 몸의 정렬은 바른지, 제대로 근력운동을 할 만한 기초 체력은 있는지, 어느 근육을 더 강화해야 하는지 사전 작업을 했어야 했어.
그러기 위해 네이버 아이디 하나만 만들면 개설이 가능한 블로그를 만들어서 과연 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는지 한 번 시험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블로그 세상에서 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날마다 새벽을 밝히며 자기 시간을 확보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감사의 거리를 찾아 날마다 감사일기를 남기시는 분들, 전문가 뺨치는 실력으로 영화나 책, 방송 리뷰를 나눠주시는 분들, 다른 이웃에게 따뜻한 공감과 댓글을 꼭 남겨주시는 천사 같은 이웃들.
글쓰기를 통해 하루를 곱씹고, 삶의 일부를 저장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수많은 이웃들을 보고 나는 비로소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무너지고 무기력함에 짓눌릴 때마다, 충실하게 루틴을 실천하며 슬럼프를 헤쳐나온 이웃들의 글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지난주, 17주년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온갖 상념이 많아지던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해묵은 욕구에 휩싸여 다시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두 달 남짓 글을 쓰면 얼마나 썼다고 실력이 늘었겠는가. 실력보다는 겸허한 마음가짐과 간절한 매달림으로 신청서를 다시 클릭했다.


꺄아아! 브런치 재수 합격 증명서



 그렇게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이메일을 확인하던 순간 나도 모르게 “어머!”하고 소리를 질렀나보다. 옆에 있던 큰 아이가 엄마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아.. 엄마가 작가가 되었어.”
뱉고 보니 우습기는 했다. 모름지기 글을 쓰고 책을 내야 작가인게지 어디서 인증서를 보내준다고 되는 건 아닌데. 그래서 다시 말했다.

아니, 엄마가 이제 작가가 되어 보려고.
작가가 되고 싶어



 아직은 무슨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에세이를 쓰기에 나의 사고의 깊이는 너무 찰랑찰랑 얕고, 소설은 사춘기 소녀스러운 세계관부터 정리하고 착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단 뭐라도 쓰면서 잔근육을 만들어봐야지.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시작으로 나의 글쓰기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사랑했던 오빠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빠들 고마워요. 내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려준 오빠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뮤즈의 축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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