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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율무 May 18. 2020

두 남자의 행복을 찾는 여정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사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에게 너무나 친숙한 책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졸업 선물로 책을 사주시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콕 집어 부탁드렸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주위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했었고, 유명한 고전이니 언젠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 결심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과제를 하기 위해 책장 제일 위칸에 꽂아두었던 책을 꺼냈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 그제야 겉표지에 작지만 굵은 글씨로 박힌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자-유-다”. 



    ‘영혼의 순례자’라고 불리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나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다시 한번 새로운 각오로 책 모서리를 넘겼다.      




조르바실존주의적 멘토가 되다


살아서 팔딱거리는 심장,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거칠고 야성적인 영혼. 가장 단순한 인간의 언어로 이 노동자는 내게 예술, 사랑, 아름다움, 순수, 정열의 의미를 뚜렷하게 일깨워 주었다. -30p


    ‘나’가 표현한 조르바의 첫인상을 보면, 이미 그는 화자에게 깊은 애정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초반에서 화자의 절친한 친구 스타브리다키스는 화자를 ‘책벌레’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얼마나 더 오랫동안 종이 나부랭이나 씹어 대고 먹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살 거냐?”라고 다그친다.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쓴 채” 살아가던 화자의 삶은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살아가는 조르바의 삶과 극명한 대칭 관계를 이룬다. 때문에 작품에서 내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화자와 조르바의 이념적·가치관적 차이이며, 그 간극의 해소 과정이다.


Zorba the Greek (1964)

    결국 화자는 조르바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전과는 다른 인물로 바뀌어 간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먹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조르바를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의 강인함과 ‘인간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존경한다. 화자가 바라보는 조르바는 이미 현세대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조르바가 도덕과 애국심, 종교와 같이 현존하는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그의 정신이 누구보다도 시대를 앞서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듯 주인공의 정신적인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식론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춘 성장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르바의 비범한 가치관과 진솔한 행동들은 당시 유럽의 종교관과 부패 등을 비판하기 위해 보다 극화되고 희화화되었을 것임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17장에서는 타락한 수도사들의 사회가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 도메티오스 신부의 동성애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헌금 모금 등이 그 예시이다. 겉으로는 속세에서 떠났지만 안으로 곪고 있는 종교 공동체와는 다르게 조르바는 내세보다는 현세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하는 등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유를 향한 여행


아, 그게 바로 자유라는 거구나. 열정을 품는 것, 그래서 금화를 긁어모으는 것, 그리고 갑자기 그 열정을 짓눌러 버리고 갖고 있는 걸 모조리 허공에 내던져 버리는 것 말이다. -50p


    저자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독자에게 “자유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로운 것은 무엇이며, ‘조르바’가 표상하는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우선 화자는 자신이 사는 동안 스스로를 옭아맸던 것이 ‘영원’, ‘사랑’, ‘희망’, ‘고국’, ‘신’과 같은 낱말이라고 말한다. 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구했던 자유의 본질은 작가 본인의 인생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묘비명이다. 작품 속에서 조르바가 현세대의 구속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또는 짐승처럼 묵묵히 인생을 걸어갔던 것은 작가가 지향하던 삶이자,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인생행복을 찾는 여정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난로에 둘러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행복은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 말하자면 포도주 한 잔, 밤 한 톨, 별거 아닌 난롯불, 으르렁거리는 바닷소리, 그런 것이면 충분했다.  -152p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나’와 조르바가 함께 느낀 행복감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 혹은 무언의 소통을 통해 생각을 나눴고 의견을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종종 ‘나’는 예기치 못한 기쁨을 느꼈고, 그 끓어오르는 행복에 대한 묘사는 나까지 덩달아 심장이 뛰도록 만들었다. 물론 조르바의 야성적이고, 자유분방한 행동들은 종종 나의 상식선을 넘어갈 때가 있었고 화자의 감정적인 기복과 깨달음 역시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눌 때 느끼던 희열만큼은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가? 


    화자는 독백을 통해 ‘아무런 야망도 없으면서 모든 야망을 품은 듯 끈질기게 일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또한 행복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되 그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거나하게 먹고 마시는 것’. ‘그러고 난 뒤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 혼자서 별들과 육지, 바다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화자는 광산 사업이 모두 망했어도, 돈을 모두 잃고 섬을 떠나야 했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Zorba the Greek (1964)

    21세기 대한민국, 한병철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이름 붙였다. 부정성이 제거되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 그에 따라 무한대의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가만히 멈춰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 나 역시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톱니바퀴를 굴리는 햄스터들 같다고.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르바가 들려주고 카잔차키스가 써 내려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일깨워준다. 그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수수께끼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고, 잠시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 모두가 조르바의 가벼운 발걸음과 ‘나’의 사색, 불현 듯 깨닫는 행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벌레에서 두더지로


“기억하겠지만, 자네는 떠나면서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네. 어쨌든 나는 내 입장을 고집스럽게 지켜 왔지만, 이제는 종이와 먹물을 잠시 동안 내던지고 구체적인 삶의 여울 속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네. (중략) 자네가 말한 책벌레는 흙을 파서 땅굴을 만들며 마침내 두더지가 되었다네.” -171p


Zorba the Greek (1964)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는 펜과 흙, 종이와 대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한다. 글쟁이와 인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가?’ 일 것이다. 화자가 묘사했듯이, 조르바는 그 누구보다 대지에 온몸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이었다. 현실적이었고, 실존주의자였고, 당장 눈 앞에 놓인 기회와 가치, 쾌락에 집중했다. 반면에 화자는 조르바의 가치관을 선망하고 그를 닮기를 원하긴 했으나, 여전히 펜을 쥐고 먼 곳에 시선을 두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여기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그래서 독자들은 조르바와 화자의 경계선에서 양쪽의 입장을 모두 경험해보게 되는 것이다. 2020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나에게 이상과 현실, 둘 중 하나를 단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운명적 상황이 흔하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고민을 하게 되는 까닭은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은 가치관에 따른 수많은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높은 이상을 위해 현실을 포기해야 할 것이고, 또 언젠가는 저자가 조르바에게 배운 것처럼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 운명의 순간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성공과 실패와는 관계없는 진정한 해방감을 느끼며,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작품 소개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46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원제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으로, 주인공인 알렉시스 조르바는 1917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고향 크레타 섬에 머물던 시절 자신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실존 인물 요르고스 조르바스와의 만남을 바탕으로 창조된 인물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가 알렉시스 조르바라는 인물을 만나 함께 갈탄광 개발 사업을 위해 크레타 섬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의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그들은 마담 오르탕스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을 만나며 ‘실제 삶’ 속으로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조르바의 자유분방하고 야성적인 면모에 강렬하게 매료되고, 그와 함께 생활하며 많은 깨달음과 변화를 겪게 된다. 다양한 사건 사고들 끝에 결국 주인공과 조르바의 광산 사업은 실패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해방감을 느끼며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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