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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율무 May 18. 2020

너무 늦어버린 구원의 시간에,  우리는 살아있는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를 읽고



    우선 25시』를 읽고 책을 덮었을 , 나는 지쳐있었고, 뻔하고 고전적인 감상을 떠올렸다.


  ‘운명과 거스를  없는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는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사람이었고, 나는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책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만을 다룬 것이 아니다. 요한 모리츠는 전쟁의, 산업화 시대의, 나치의, 공장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다. 『25시』의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요한 모리츠라는 사람의 생을 통해 이러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1940년대 유럽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현대사회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은 이 탓일 것이다. 더 이상 전시가 아니고 포로수용소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포로들이 있으며, 이 책은 그 포로들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인간의 야만성과 기계의 정확함


    스잔나의 아버지인 요르그 요르단은 한마디로 ‘야만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폭행사건을 담당하게 된 젊은 검사 조르주 다미앙은 ‘야만성이 요르단의 유일한 범죄였다’고 말한다. 이 타고난 야만성, 즉 다른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이 죄악을 처벌하는 법률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만성은 아주 확실히 드러났을 몇몇 경우에만 불법적인 행동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검사는 요르그의 야만성을 정죄했다. 그것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상태이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어쩌면 현대사회에서도 야만성은 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조르주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범죄는 결국 야만성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태생적인 속성을 벌할 궁리를 하는 사이에, 게오르규는 나에게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인간이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면, 기계는 어때? 하고.


 “기계 노예란, 그것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수많은 봉사를 해주는 하인이야.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고, 빛을 주고, 세수할 물을 보내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길을 만들어주고, 산을 헐어주고 있지.” -57p


Modern Times (1936)

    트라이안의 설명, 그리고 ‘기계 노예라는 단어만 듣는다면 기계는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 지구 상에 존재하는 기계 노예의 수가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계 노예들이 현대사회 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계는 트라이안의 말마따나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주고, 상품을 더욱 효율적으로 생산하도록 돕는다. 그들에게는 오차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모리츠가 배치된 공장의 관리자는 기계의 철저함과 정확도를 칭송한다.


  “기계는 규율의 문란을 용서하지 않는다. 기계는 무질서와 태만, 그리고 인간의 나태를 용서하지 않는단 말이야!”


  가혹하고 냉정한 소리로 들리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1940 독일 수용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계와 같은 효율성 현대사회에서  어떤 가치보다 추앙받는 미덕이라는 점이 그때 생각이 났다.  



   

그러므로 기계화되어가는 인간


 “우리는 노예들을 더 잘 부리기 위해서 그들의 법률과 말을 배우게 되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인간적인 특질과 인간 고유의 법률을 포기해버리게 되는 거지.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최초의 징조는 인간에 대한 멸시로 나타나지. 현대인은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60p


    기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기계를 동경하게 하고, 이는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자발적인 인간 소외이다.  대목을 읽으면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아이들에게 컴퓨터 언어를 가르치는 수많은 학원들과,  이상 순수학문을 인정 하지 않는 교육 체계가 생각났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변화들을 보며 사회의 발전에 따른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도 이와 같은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바람직한가'?


    트라이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이미 ‘기계를 동경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기계의 일부가 되기 위해 그 흐름에 발맞추려 애쓰는 인간 중 한 명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개개인의 인간성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트라이안은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까지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회적 관계 역시 정확하고 자동적인 어떠한 부품처럼 취급될 거라는 말이다. 흔히들 ‘요즘 애들’의 소통법이라고 말한다. sns를 통한 연락, 늘어나는 메신저의 양, 얕고 넓어지는 관계들. 나의 sns 친구들을 떠올리다 보니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나에게 인간관계는 어떤 의미인가? 나는 어떤 관계를 추구하며 어떤 친구를 사귀는가? 어쩌면 나에게도 친구란 그때그때 대체 가능한 부품이 아닐까? 지금껏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이유는, 기계적이고 ‘쓸모 있는’ 인간관계가 너무나 당연해진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관계, 먹고 마시는 것, 그 모든 분야에서 인간은 부품화 되어간다. "개인은 존재할 권리를 상실한 채 마치 하나의 피스톤이나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될 것"이라는 트라이안의 예언처럼 현대사회에서 우리들은 사회를 이루는 각각의 부품처럼 살아간다.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나 효율적인 생산이다. 예전에 어느 사회학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한 날에 자괴감이 드는 것. 그것 역시 자본주의의 폐해가 아니겠니?”


    아,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일상적으로 느껴왔던 ‘아무것도 안 함’에서 비롯된 자괴감은 절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며 몸으로 학습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산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기계가 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거다. 『25시』안에서 이러한 인간의 기계화/부품화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 중 하나는 공장의 노동자를 위해 몸을 파는 여성들이 대거 투입되는 장면이다.


 “독일인들은 포로들에게 여자를 안겨주지 않으면 일의 능률이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일이 잘되기를 바랐다. 여자들을 불러온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무자들이 단추 공장에서, 제사 공장에서, 그리고 주조 공장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21p


    그곳에서 여성은 노동자들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로지 생산의 부수적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버무려진, 고전적인 인간의 부품화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작가는  참상을 덤덤하지만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21세기에도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희는 어떤 부품으로 쓰이고 '.  




인간 존엄성: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는가?


    트라이안과 모리츠가 함께 수용소로 송환되는 길에서, 트라이안은 함께 트럭에 타고 있는 일흔 명의 포로들을 ‘살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이들’이라고 칭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 장면은 노동과 생산의 수단이 된 인간, 거대한 힘 앞에서 기계로 전락한 노동자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존재들인가? 존엄성이 무엇이길래? 인간 존엄성은 어떤 경우에, 어떤 상황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게오르규가 조심스럽게 다루고자 한 이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문제는, 헝가리 정보국 국장인 바르토리 백작과 그의 아들 루시안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너는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마치  자동차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인간을 존중한다는 말이구나."

그게  나쁜가요?”

그렇다면 너는 인간을  고유한 가치,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의해서도 존중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을 경우엔 반드시 상대방을 가엾게 생각하며 후회를 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개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지. 너는 네가 어떤 생물에 대해서 품을  있는 동정을 인간에게도 품고 있을 뿐이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떤 인간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거나, 또는 동물과 같은 연민이나 애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경우에도 너는 과연 인간을 인간으로서, 무엇과도 바꿀  없는 유일한 가치로서 존중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88p


    어떤 인간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거나, 또는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경우에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유일한 가치로서 존중하는 .’


  바르토리 백작이 스스로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해친 것을 괴로워하며 꺼낸  말처럼, 인간 존엄성은 그저 동정하고, 연민하고, ‘ 쓸모를 인정해주는  아니다. 나는 어떤가? 나는 정말 인간을 존중할  아는가? 나는 아직은 이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과연 찾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사람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똑같은 만큼의 사랑으로 그를 존중하는 일은 절대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 나만 해도 누군가 나에게 베풀  있는 호의와, 나에게   있는 도움의 양에 따라 상대에 대한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 코르가 신부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바람직한 정답을 제시한다.


 “최고로 고귀한 이상, 즉 국가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인 어떤 이상을 위해서라도 한 인간을 부당하게 다루는 것은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을 노예화하는 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 -107p


    여기서 노예화란, 그저 가시적으로 사람을 족쇄에 매고 수용소에 집어넣는 것 따위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노예화란 우리 스스로가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스스로 기계가 되기를 자처하는 모든 노력들까지도 일컫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간의 노예화를 반대한 코르가 신부.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며, 우리는 모두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카테고리 속의 나: 폭력적인 일반화


 “진보의 최후 단계에 접어든 서구 문명은 개인의 존재에는 신경도 쓰지 않게 마련이오. 이 사회는 개인이 지닌 약간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거든. 우리는 단지 하나의 카테고리의 무한히 작은 분자로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 ··· 이 사회는 당신을 그러한 특징으로밖에 인정하지 않고, 결국에 가서는 곱셈, 나눗셈, 뺄셈, 덧셈의 법칙에 따라 당신이 소속된 그룹 전체로서의 당신을 대우하는 것뿐이오. 당신은 루마니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그 작은 분자가 붙들린 셈이지, 체포된 원인-또는 죄-은 당신이 이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는 데에 있소.” -319p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처럼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할 만큼의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초를 당했고, 국가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네가 그 나라에서 태어난 탓”이라고 일축한다.


Life Is Beautiful (1997)

    지구 상에는 70억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 모두가 다르게 생겼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며, 각자의 사정이 있다. 트라이안이 말했듯이 ‘오직 기계만이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전쟁의 위험성은 이러한 개개인의 특성들이 완전히 몰살된다는 점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 개인이 희생당하길 강요하며 극단적인 진영논리는 사람들은 큰 무리로 나누고 그 무리 안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속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프랑스인을 구해줬지만 적국의 태생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포로가 된 모리츠처럼 말이다.


    사회심리학의 측면에서, 사람은 외집단을 볼 때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쉽게 구성원을 동질화시킨다고 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타인들의 특징을 납작하게 압축시켜 버리는 것. 전쟁은 끝났고 심각하던 인종주의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약화되었지만 21세기 현재,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물체화 시킬 뿐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을 거만하게 동질화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범주의 일부분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어느 미군 장교의 말마따나 "실질적이고 신속하고 정확하고 공정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또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으로서, 너무 쉽게 타인을 타자화하고 있지는 않았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미국과 민주주의, 그 허황됨에 관하여


    극단적인 진영논리와 관련해, 나는 작품 속 ‘미국’의 의미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싶다. 『25시』에서는 마치 수미상관 구조처럼 작품의 도입부에서, 그리고 결말부에서 미국이 등장한다.


    초반부에 모리츠는 수많은 젊은 농부들이 그랬듯이, 미국에서 큰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와 마을에서 땅과 집을 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미국에 대한 환상은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제인 코르가 사제 역시 젊었을 적부터 어렴풋하게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해 “우리가 꿈속에서 현실이라고 믿었던 그 무엇, 다시 말하면 실제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향수"라고 말한다. 그래서 막상 그것을 우리가 실제로 만져보게 되면 우리는 곧 꿈속에서 그리던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결말부에서, 코르가 신부는 미군 포로수용소 안에 누운 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꿈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중 하나인 미국에 가는 꿈은 ‘미국이 나에게 옴’으로써 이상한 형태로나마 이뤄지게 된다.


    이러한 수미상관 형식의 마무리를 통해, 게오르규는 ‘미국’이라는 달콤하지만 허황된 꿈을 풍자적으로 비꼰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피해자들에게 미국은 독일, 소련, 루마니아, 헝가리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억류한 나라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내세우지만 결국은 다른 참전국가들과 같이 죄 없는 이들을 너무나도 쉽게 제압하고 구속해버린 미국을 생각한다. 나 역시도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던 틀에 박힌 진영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우리의 사고가 늘 그렇듯이, 추축국과 연합국을 분리하고 어느 한쪽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동경하고, 정당화하고,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게 그 중심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을 향해 있었다.


    덧붙여 나는 미국이 표상하는 ‘민주주의’ 역시 새로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전체주의보다는 확실히 우수하더라도 인간을 사회적인 차원에서만 취급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고 탄식한 트라이안처럼, 나 역시 민주주의라는 사회 체제가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과연 톱니바퀴이고 피스톤이지 않은 채, 각자의 고유한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혹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고전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더 나은 제3의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며 나와 타인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될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게오르규가 고발하고자 한 현대사회의 참상들과, 우리에게 던져주고자 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곱씹으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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