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독자들은 책의 첫 페이지를 엶과 동시에 충격에 빠진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거대한 갑충류 벌레가 되어 깨어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침착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가족들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가족들은 그에게 일어난 변화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만다. 그레고르는 점차 인간과 벌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잃어가고, 가족들은 경제적인 고충에 시달린다. 결국 그레고르와 가족들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그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맞아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레고르의 집에 입주해 있던 하숙인들이 그의 존재를 발견하는 소동이 벌어진 날, 그는 가족들의 적대감 속에서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둔다.
이 비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나에게 절대 생소하지 않게 다가왔다. 유명한 고전 작품인 만큼 중고등학교 때부터 몇 차례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소재는 ‘10대 때 읽어야 하는’ 수많은 고전 소설 중 그나마 독특하고 재미있는 책을 찾아 뒤적거리던 나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책을 덮고 난 뒤의 단순한 감상은 ‘슬프다, 허무하다, 어딘가 찝찝하다’. 더 깊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렇게 결론을 짓고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금 다시 한번 『변신』을 펼쳤다. 같은 영화도 두 번 볼 때와 세 번 볼 때가 서로 다르듯이, 이 작품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일지 더욱 깊게 고찰해 볼 수 있길 바라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쓸모없는 존재’로의 변신
집에 돌아와 돈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식구들은 모두 행복해서 입이 벌어졌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나중에 그레고르는 온 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후로 그런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눈부신 모습으로는. -56p
그레고르는 잠자 씨네 식구들 중 유일하게 직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가족들은 그가 벌어오는 돈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위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족들이나 그레고르는 이러한 삶의 패턴에 익숙해졌고 이제 그레고리의 희생은 짐짓 당연한 일처럼 치부되었다. 식구들은 그레고르가 벌어다준 돈을 감사하게 받았지만 애틋한 정 같은 것은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고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레고리가 벌레가 된 후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가족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레고리의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였다는 사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눈에 보이는 것, 경제적인 것, ‘쓸모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물질주의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사회조직인 가족에까지 철저하게 침투한다. 물론 소설에서는 거대한 벌레라는 시각적인 소재로 이를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카프카가 묘사하고자 한 것은 ‘더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직장에서의 생존 여부를 걱정한다. 또한 그레고르의 여동생인 그레테는 벌레로 변한 오빠의 뒤치다꺼리를 맡게 된 이후에야 ‘애물단지’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듯이 묘사된다. 그레테는 그레고르를 밟고 드디어 기능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레고르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모순적이다. 인간이었을 때는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를 돈을 벌어오는 기계 정도로 생각했고, 그것은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노동과 소비의 굴레 속에서 흔히 말하듯 톱니바퀴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벌레가 된 후에 그는 누구보다 열렬히 가족과의 소통을 시도하나 그의 외침은 가족들에게 그저 짐승이 웅얼대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들의 싸늘한 태도를 보면서도 내가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식구들이 집을 옮기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오히려 완전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친척들이나 지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당해보지 않은 그런 불행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그들은 최대한 이행하고 있었다. -94p
‘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바.’ 그리고 그에 따른 절망감. 수많은 뉴스에서, 기삿거리에서, 우리 주위에서 보았고, 그리고 어느 가족이라도 한 번쯤은 느껴보았을 그 절망의 늪. 그리고 이것은 비단 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레고르가 그랬듯이, 나 역시도 나의 가치를 ‘기능’적으로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통과 애정보단 먼저 그 가격을 저울질해보았던 것은 아닐까. 프란츠 카프카는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가치의 계산법’을 명쾌하게 깨뜨린다.
누가 그를 죽였는가?
그레고르는 처음 벌레로 변신한 순간부터 계속 자신을 파악하고 관찰한다. 이를 통해서 독자는 그레고르가 계속해서 인간과 벌레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벌레로서의 육체적 편안함에 안주하며, 가끔은 정신을 차리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레고르의 죽음이,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삶을 이어나가길 포기한 것과,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망각한 것, 가족들이 그들의 적나라한 증오를 드러낸 것, 이 세 가지 순간이 맞아떨어져 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레고르가 여동생과 부모에게 버림받는 과정은 가족들의 무심해짐, 그리고 익숙해짐과 겹쳐져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카프카는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도 이 모든 사태가 어느 누구의 잘못임을 지목하지 않는다. 모두가 어쩔 수 없었고, 모두를 위한 가장 최선의 행동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우리 사회의 이기주의와 그 필연성을 잘 짚어냈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자본주의와 이기주의가 결합된 차가운 세상 속에서, 결국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보며 더욱 씁쓸해진다.
죽음을 밟고 선 해피엔딩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생각해보니 전망이 그리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잠자 씨 부부는 점점 생기가 도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아름답고 탐스러운 처녀로 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목적지에 이르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젊은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을 때,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 -126p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 작품을 몇 번 읽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는 마치 극장에서 영화 <기생충>을 처음 보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허황되고 소름끼치도록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니.
우리가 가슴 아픈 일을 겪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논리로 보면 잠자 씨네 가족은 성공적으로 마음을 잘 추슬렀을 뿐 아니라 빠르게 회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충실히 준비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방금 (벌레로 변한) 아들을 죽음에 몰아넣었고, 그를 잊기 위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해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입장이 너무도 잘 이해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결말이 더욱 허무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와 현실적인 배경을 결합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부조리성을 적나라하게 대두시킨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21세기에까지 남아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스로 기능적인 인간으로 평가받고 시스템의 일부가 되길 자처하던 나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살아있는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