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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Aug 29. 2020

겨울나비. 49 일편단심 아가사 크리스티

함께 하는 즐거움

나는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6장짜리 시험 문제지의 첫 장을 덮은 채입니다. 내 몽블랑 아가사 크리스티는 일련번호 70000개 중 17436번으로 한정판입니다.     

나는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좋아합니다. 만년필 이름도 아가사 크리스티인 것이 반갑습니다.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 시뻘건 눈에 내 눈을 마주치며 말합니다.          

" 아가사, 그동안 너의 고생이 수월찮았다. 반복하고 많이 피곤했지. 오늘, 너는 나와 매일 함께했던 시간 내내 써 내려갔던 내용을 빠트리지 말고 이 시험지의 답안지에다 너의 독처럼 쏟아 주길 바란다. 너는 한 번 보았던 것을 잊지 말고 한번 물면 상대를 쓰러트리는 너의 독을 다 쏟아야 한다. 아가가, 이제 시간이 되었다. 너의 능력을 보여다오. "          

강서 보건소 근처 한국전기공사 협회 본부 ISO 심사원 시험장의 칠판에는 시험 답안은 검은색이나 청색의 볼펜으로 쓰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만년필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와 아가사와의 은밀한 약속이 있어서입니다.     

볼펜으로 답안을 쓰는 시험지에 만년필이 안 된다면 무슨 경우인가?          

ISO 심사원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매일 몽블랑 아가사 크리스티 만년필로 첫 글자를 쓰기 전에 나는 내 심정을 말했지요.     

"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있다. 한 번 쓰고 다시 쓰고 너의 본능과 동작에 관행을 심어주지 마. 대신 너는 기억해다오. 답안지를 쓸 때 너는 내 머리가 회전될 때 보다 더 빨리 너의 촉으로 썼던 기억을 글씨로 보여다오. "     

아가사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 듯합니다.     

다만 한 자루의 만년필이 무슨 영적 신념과 반응이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 최면이며 만년필 하나에 마음 의지하는 小心 탓인지도 모르지요.     

아가사는 제가 아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같이 서둘러댑니다.     

나는 그를 따라, 갈 수가 지경으로.     

팔목이 저려올 지경으로.          

진정해라. 천천히. 아가사가 모르는 문제에는 멈칫하고 잠시 꽈리를 틀다가도     

꾸준히 꼬리를 흔들며 목표를 물고 검은 독을 뿌리며 흔적을 남깁니다.          

답안은 채워지고 때로는 진실이 적히고 때로는 옹색한 허위의 기록을 남기면서     

아가사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어쨌든 다만 사물에 불과한 만년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응답과 함께 나의 오후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 뒤 나는 몇 번 실패하고 품질인증 심사원 (ISO) 합격증을 받았습니다.     

남은 것은 아가사가 내게 준 사랑의 힘입니다. 아직도 아가사는 사랑에 불타는 눈빛으로  나와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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