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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Aug 31. 2020

겨울나비. 50 연봉 6천만 원 자격증

빛 좋은 개살구

1990년도 들어서서 기업마다 ISO 인증을 받지 않으면 명함 내밀기 쑥스러웠다.

1997년도에는 건설회사 중에서 현대나 동아, 대림 등 1군 회사의 협력 회사들은 협력사로 등록하기 위하여 필수조건으로 인증을 받아야만 했다.


1998년도에 건설사를 퇴사한 직원 중 일부는 한국 품질인증협회(KB)에서 실시하는 품질 보증 체제 인증 심사원 자격 부여 시험에 합격해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심사원이 되었다.


30~40대 심사원은 능률 협회, 표준 협회, 생산성 본부인증원 등의 기관에서 상근 심사원으로 일했다. 40대 후반에서 5~60대 심사원들은 상근으로 일을 못 하고 비상근으로 1년간 계약에 의하여 매월 심사 일자를 지정받아서 심사를 나갔다. 1998-99년도에는 하루에 25만 원을 받았다. 한 달에 20일을 일했다.


전국을 다니며 심사를 하느라 고달파도 한 달에 500만 원이고 1년이면 5~6,000만 원의 수입이 되니 현역으로 뛸 때보다 살맛 나는 일이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는 이미 심사원으로 활동했고, 자기 돈을 들여서 사업할 자신이 없는 나는 목표를 심사원 자격 따기로 들어갔다. 만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1998년 4월부터 시험 보려고 필수 과정인 교육과정을 거치면 3번의 자격을 주는데, 나는 연전연패를 하고 말았다. 다시 교육을 또 받아 시험 보고 떨어지고 하며 교육을 또 받고 여섯 번째에 합격했다. 1년이 걸렸다. 길고 힘든 세월이었다.


연봉 6,000만 원의 꿈을 안고 시작한 공부의 결과는 지금 어떤가. 건설회사는 무너지고 협력사가 함께 부도가 나는 판에 ISO도 물 건너갔다. 시험 보고 실습에 6개월을 보내고 정작 인증 기관에 심사원으로 등록했다. 첫 달에는 하루의 심사도 없었고, 다음 달에는 단 하루를 배정받았다. 심사 수당도 20만 원으로 조정되었다.

세금 떼면 19만 원이 조금 넘는다. 그 뒤 몇 번 심사를 나갔다. 서울, 수도권 혹은 부산 등등. 희망을 품고 시험을 보고 떨어졌던 날들의 기록은 차라리 눈물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생산성본부의 심사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남에게 그 기관의 명함을 준다. 올해에는 한 번의 심사도 없었다. 생활이 되지 않는 자격증. 차라리 선거 사무실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나서는 아르바이트가 생계에 보탬이 된다.

한국생산성본부 품질인증원 소속이라는 허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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