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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Nov 06. 2020

겨울나비. 58 엄마는 생각쟁이와 인터뷰

사양해도 온다니...

작년에 생전 처음 나왔던 내 책이 아직은 숨쉬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하자는 사람이 무슨 일로 만나자는 말을 대강은 하여준다.

잡지사의 기자거나 방송국의 작가들이 연락을 준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신문이나 잡지라든지 TV 하고는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고는 더더욱 매스컴을 탈 일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다가 라디오 방송에 보낸 글이 방송이 나가고 상을 타고 인터뷰를 해서 잡지에 나왔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없고 나 자신이 무슨 변화가 더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방송을 들었네! 잡지에서 보았네 하고 가물에 콩 나듯 아는 채 하는 가까운 이들이 더러 있어도 인생의 무슨 훈장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인터뷰 취재를 하고 난 뒤에 기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새롭게 창작을 하다시피 한다는 것이 때로는 혼란스럽고 낯 뜨겁기도 했다.

어떤 때는 준비된 취재 수첩 없이 오는 경우에는 내가 미리 말을 다 해주기도 하고 메모 하나 없이 듣고만 있으면 메모를 하지도 않고 나와 헤어진 뒤에는 어찌 기사를 쓸까 하고 궁금할수록 나중 기사는 창작의 깊이가 더 깊어지니 질색할 노릇이었다.

메모를 대강하는 기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취재한 내 이름도 제대로 적지를 않아서 기사문의 내 이름을 개명을 하기까지 한다. 그럴 바엔 알아서 스스로 쓰고 말지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서 시간을 빼앗기는지.

이번에 인터뷰 요청은 웅진닷컴에서 발행하는 사외보 <엄마는 생각쟁이>였다.

작년 12월 호에는 내 책 <어머니, 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에서 아내와 나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옮겨 실었다. 그 내용을 보고서 엄마들이 재미있다 하여 취재를 해보라는 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에 내키기보다 주저했다.

남들이 다 지키는 가정을 나도 지키고 있을 따름이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글로 옮기니 남들이 보기에 재미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책은 신문의 서평이나 잡지에서 언급된 일이 없었다.

출판사가 여유가 있어서 책 광고를 질펀하게 할 처지가 아니었고, 내가 신문사의 도서 담당자를 만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도 않으려니와 남들은 인정하여 주지를 않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기에 기죽을 노릇이다.

그러니 <엄마는 생각 쟁인>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소식은 내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그 책은 한 달의 발행 부수가 10여만 부가되니 그만한 독자에게 내 책의 내용을 만나게 하다니, 손 안 대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실없는 계산을 내 딴에는 했다.

인터뷰해봅시다 하고 말하니 아내는 펄쩍 뛴다. 아내는 남 앞에 나서기를 아주 완벽히 꺼린다.

할 말도 없으니 하고 싶으면 혼자서 집 밖에서 만나라는 것이다.

잡지사의 편집 담당자에게 내가

"나는 아내를 설득 못 하겠으니, 담당자가 해봐요. "

했더니 전화가 여러 차례 오고 가던 끝에 아내가 손을 들었다.

아내가 내게 하는 말은

" 이게 마지막이에요. 자기가 하라 하기에 하는 것이나 다음부터는 어림없어요. "

하고 단단히 오금을 박는다.

이래서 잡지사의 편집자와 시간 약속을 하였다.

이렇게 인터뷰를 해서 내가 세상에 알릴 것은 무엇인가.

우리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만에 결혼했냐고 물을 것이다.

햇수로는 2년이지만 8개월만 이었다.

나는 아내가 꿈꾸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아내는 내가 일기장에 그림 그려놓았던 모습과 심성 고운 여인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리라.

책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냐 물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글을 사랑하며 자기 책을 한 권쯤은 가지고 싶으니 부럽기도 하여 물어볼 터이니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2년 가까이 어떤 인터넷 신문에 글을 올리다 보니 우연히 출판사 사장 눈에 뜨여 책을 만들자 연락이 와서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이 나왔으니 횡재를 한 듯하다고 말하리라.

묻다 보면 기자는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나를 또 만나고 싶냐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조금은 진지하게 물어 올 것이다.

아내는 다시는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다. 우문현답일 것이다. 나는 100점짜리 남편이 아니었고 편안한 남편은 아니었다.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를 또 만나고 싶다 할 것이다. 아내에게 반평생을 신체장애를 껴안고 살아가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나였고 보니 나는 아내를 위한 헌신의 세월을 현생만으로 안 된다. 내생까지 업을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잘 자랐냐고 물어볼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부모를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고 있으며,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보다 집 안으로 들어오며 평안을 느끼니 행복하다.

자식의 효도는 그 정도면 되지 않은가?

기자는 아내에게 물을 것이다.

장애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남편이 글을 올리니 기분이 편치 않냐고.

자주 언급할 정도가 아니다. 장애는 살아가는데 아주 불편한 현실이다. 자주가 아니라 수시로 느낀다.

나는 아내의 굽어 들어가는 손목과 발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굽혔다가 펴주어야 하건만 아내의 침묵에 나는 잊으니 남편 노릇이 부실하다.

때로는 잠결에 나는 내가 내 일을 다 못했다는 자책으로 괴롭다.

그 마음은 글이 되니, 나의 반성문이다.

기자는 아이들에 대한 기록이 있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카메라를 들이댔었다.

아이들의 유년 시절은 앨범마다 가득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은 카메라를 피하고 나는 내 마음속에 아이들을 담아 놓았으니 세월 따라 지워지고 잊히고 만다.

아이들에 대하여 일기를 5년 일기를 써왔다.

살다 보면 아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낡은 일기는 아이들은 우리 품에서 자랐다고 증거 제시를 한다.

아내와의 사랑은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될 때까지라는 것인가. 상대방이 양보하기를 바라기 보다 자신의 양보가 화목한 가정을 약속한다고 말을 할까?

아이들을 보살필 때는 엄마는 자애롭고도 친구같이 하고, 아버지는 집안의 울타리로서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온돌처럼 따뜻하게 대해주고 지붕 되어 찬 서리를 막느라고 힘든 세월이었다고 할까.

사실 그래왔다. 막상 말하려 드니 충실한 아버지 노릇을 하였는지 갑자기 막막하여진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당하는 인터뷰는 자신을 돌아보는 이정표가 된다.

살다 보니 내가 쌓아 올렸던 벽돌 하나하나가 사람들 눈에 뜨이는 물건이 되었다.

기자 양반, 언제 오시려는가?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출입구의 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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