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밥 안 하는 전업주부'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밥만 하는 전업주부' 이야기도 해보려 한다.
밥만 하는 전업주부 친구는 바로 옆집에 살던 캐네디언이다. 두 아이들의 나이가 같다 보니 뻔질나게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다. 하교한 아이들이 책가방만 던져놓고 놀러 가면 두 집 아이들 간식을 함께 챙겼다. 어떤 날은 예정에 없던 저녁도 함께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집에는 언제 어느 때 놀러 가도 늘 홈메이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쿠키는 기본이고 아이들 간식부터 식사 빵까지 늘 홈 베이킹을 한다. 쨈, 과일청, 피클, 페스토, 파스타 소스 등 저장해 놓고 먹는 음식도 직접 만든다. 아이들 생일파티 케이크도, 식사 후 디저트도 홈메이드가 아닌 것이 없다. 더운 날 냉동고에서 꺼내 줬던 쭈쭈바 하나 빼고는 그 흔한 냉동식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옆집에 살던 4년 동안은 정말 그랬다.
홈메이드 음식은 먹을 때는 뚝딱이지만, 만들 때는 한참이 걸린다. 상당한 노동이 필요한 일이다. 친구가 선물해 준 사과소스가 그렇다. 4년을 동네 이웃으로 살다가 우리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던 날, 친구는 우리가 살던 집 뒷마당으로 가서 사과를 땄다. 그리고 그 사과로 사과소스를 만들었다.
그 집에 살던 4년 내내 나는 따 먹을 생각도 못했던 사과인데 그걸로 사과소스를 만들어 오다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과를 따고, 새들이 쪼아 먹은 부분을 도려내고, 깨끗이 세척해서 껍질을 벗겨내고, 조각조각 잘라 계속 저어주며 뭉근히 끓이는 것. 크지 않은 병을 다 채우지도 못할 만큼 적은 양이지만 주부라면 모두 안다. 이 적은 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했을지.
어떨 때는 그녀의 하루를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이해가 안 됐다. 나와 똑같은 나이의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막둥이 셋째에, 남편이 집을 비울 때도 많은데, 왜 나는 안 되고 그녀는 되는 걸까?
시간을 관리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는 건지, 아니면 네다섯 시간만 자도 되는 숙면의 비결이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혼자 놀게 하는 육아의 비법이 있는 건지. 어떤 하루를 살면 저렇게 A급 엄마로, A급 주부로 살 수 있는 걸까?
사과소스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넌 진짜 대단해. 아이 셋을 키우면서 어떻게 매번 이런 걸 만들어?"
"Just, I like things like this.
그냥, 난 이런 게 좋아."
밥 '안' 하는 친구가 말했던 'My thing'이 여기에 또 나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밥은 안 하지만 집 정리를 좋아하는 전업주부는 짬이 날 때마다 집을 꾸몄고, 요리를 좋아하는 전업주부는 짬이 날 때마다 부엌에 서 있는 거다. 별다른 비결이 없었다. 그녀가 요리에 쏟은 시간과 노동은 단지 그녀가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짬짬이 하는 일만큼 열정과 정성을 쏟는 일이 없다. 따로 시간을 내야 가능한 일이라 늘 마음속에 그 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짬을 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일을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난 짬이 날 때 어떤 일을 하지?'
나는 짬이 날 때마다 글을 쓴다. 첫 글을 썼던 작년 5월 20일. 일 년 넘게 쓰고 있는 걸 보니 분명 나는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 글쓰기를 My thing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인 것은 가끔 글 쓰는 일에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청소도 아니고, 요리도 아닌데, 전업주부에게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을까?'
'노트북 앞에 앉을 시간에 내일 아침식사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닌가?'
'글 쓸 시간에 아이들 책이라도 한 번 더 읽어주는 게 낫지 않나?'
무엇보다,
'작가도 아니면서.'
어느 날, 짬 날 때마다 밥만 하는 친구가 깜짝 놀랄 소식을 전했다. 이사를 마음먹고 마음에 드는 농장을 찾는 중이라 했다. 한 귀퉁이로 시작했던 뒷마당 텃밭이 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사이즈가 커지더니, 이제는 정말 온 가족이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좋은 식재료로 이어져 농작물을 직접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꽤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밥 '안' 하는 친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말했다.
"나라면 못가. 난 거기 가면 죽을 거야."
나도, 밥만 하는 친구도 웃음이 빵 터졌다.
“알지, 알지. 우리가 너를 알지."
어쩜 이렇게들 자기의 thing이 뚜렷한지, 참 재밌다. 그리고 부럽다. 전업주부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부럽고, 그 일을 짬을 내서 끝까지 하고 있는 그 뚝심이 부럽다. 참, 밥 안 하는 친구는 사업을 시작했다. 친정 오빠가 하던 창문 주문 제작 사업을 함께 하게 되었단다. 자동차는 안 세우고 컨츄리 펍처럼 예쁘게 꾸며두었던 차고는 샘플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전업주부가 짬을 내서 하던 일들이 결국은 뭔가를 이뤄낼 수도 있나 보다. 대단한 것은 아니라도 짬을 내서 하던 일을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뀐다. 밥만 열심히 하던 전업주부는 농장으로 가게 되었다. 밥 안 하고 인테리어에 빠져있던 전업주부는 창문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요리가 재미없어서 밥만 하는 전업주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전업'이라는 말이 주는 책임감 때문에 밥 안 하는 주부도 못한다. 밥만 하지도 않고, 밥 안 하지도 못하지만 짬이 날 때마다 글을 쓴다. 지금 이런 나의 삶이 그 방향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속 쓰다 보면 친구들처럼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작가도 아니고 전업주부지만 일단 쓴다, 오늘도.
밥 안 하는 전업주부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아래 링크로 :)
https://brunch.co.kr/@ilae9213/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