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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Sep 25. 2023

영적 긴장감 (삼하 6:6-11)

교회밖의 나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제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반응이 다릅니다. 남자들은 면허 딴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운전이 답답하다고 말하고, 여자들은 나도 모르게 잠들 만큼 편안하게 운전한다고 말합니다. 빠르게 요리조리 다니는 사람들에게 저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천천히 몸의 흔들림이 적은 운전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운전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제 차가 천천히 움직이는 이유는 운전을 하며 방어기제를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목에서, 차들 사이에서 사람이 튀어나올 수 있는 가능성, 신호가 바뀌어도 막 빨간색이 된 반대편 신호에 급하게 액셀을 밟는 차량이 튀어나올 가능성처럼 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기제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고를 잘 내지 않지만, 몇 년 전에 좌회전을 하며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시청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는데, 깜빡하고 집에 신분증을 두고 와서 다시 집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사실, 천천히 운전해도 되는데, 스스로 잘 챙겨가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운전을 서두르게 되었고, 시청에서 나가는 길목에서 좌회전을 하다 접촉사고를 냈습니다. 내 감정과 상황 때문에 운전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기제를 나도 모르게 놓진 것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2017년 운전면허 소지자 및 교통사고 가해자 성비를 보면 운전면허 소지자 비율이 남성은 58.4%, 여성은 41.6%로 면허 소지 비율에 큰 차이가 없지만, 교통사고 가해자 비율은 남성이 79.1%, 여성이 20.9%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물론 저희 아내처럼 장롱면허인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고 비율에서의 차이는 매우 큰 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감히 교통사고 원인에 대해 판단을 내릴 위치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잘하는 운전'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남성은 빠른 운전을 선호하고 운전할 때 긴장감보다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반면 여성은 빠른 운전보단 정확한 운전을 선호하고 운전할 때 긴장감을 어느 정도 유지합니다. 남성이 기계를 잘 다루고 공간감이 뛰어나지만, 운전할 때 갖춰야 할 긴장감의 부재로 오히려 겉보기에 운전이 미숙해 보이는 여성보다 교통사고 가해자 비율이 더 높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운전에서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사고를 예방해 주는 것처럼, 우리는 삶에서 영적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적절한 영적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바벨론이 다윗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며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70년간 머물렀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해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이용했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휘청거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잡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옳게 보시지 않아 그를 치셨고, 모든 승리를 장식하는 피날레 행사는 하나님의 분노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해 매우 속상해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왜 궤를 안전하게 붙들기 위해 손을 댄 웃사를 치셨을까요? 원래 하나님의 궤는 허락된 자가 아니면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70년간 하나님의 궤를 맡아온 웃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궤가 흔들리는 그 순간, 그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의 경외함은 사라지고 자신이 알고 있고 익숙한 하나님의 궤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 그리고 급한 순간에는 이처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영성에 상관없이 육신의 반응이 먼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살짝 놓진 긴장감 때문에 큰 교통사고를 내는 것처럼, 웃사는 살짝 놓진 영적 긴장감 때문에 하나님의 귀환을 기념하는 잔치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긴장감을 잃어버린 것은 비단 웃사만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궤를 옮기는 방법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원래 고리를 걸어서 사람들이 매고 운반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운반하는 사람 역시 '고핫 자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땅으로 들고 간 방식처럼 수레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궤를 옮긴 것입니다. 마지막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한 번 승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공격하는 장소와 공격을 개시하는 시점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큰 승전을 거둔 다윗이 정작 승리를 얻고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순간에는 영적 긴장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웃사가 익숙한 것에서 긴장감을 잃었다면, 다윗은 승리와 기쁨에 도취되어 긴장감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 땅의 누구의 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편도 아니고, 다윗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말씀의 편에 서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민족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고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그는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의 궤를 한 발짝 옮기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다윗이 왕이 된 것과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의 마음에는 이러한 국민들에게 자신의 승리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하루빨리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승리와 명예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가 석 달 동안 머무르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도록 확신을 주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는지,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고 다윗은 마침내 기쁨으로 하나님의 궤를 들고 나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궤를 '메고' 나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방식을 블레셋의 수레가 아닌, 규례대로 정해진 방식으로 옮긴 것입니다. 기쁨의 순간, 잔치의 기간에 음성을 듣기 위해 세 달을 멈추는 것, 자신이 하는 행위가 말씀에서 벗어난 것은 없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 긴장감을 가진 삶입니다. 삶에서 고난이 있을 때, 사람들은 쉽게 영적 긴장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 승리의 순간에는 그러한 긴장감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립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승리가, 우리가 얻은 상급이 영적 긴장감을 상실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러한 승리와 상급은 차라리 없는이 못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곳도 없지만, 너무 편하고 쉬운 곳도 없습니다. 모든 곳에는 따라야 할 말씀이 있고, 모든 곳에는 우리가 지녀야 할 영적 긴장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에 왔을 때 나의 모습보다, 교회를 떠나기 전 가정에서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치열한 직장에서의 나의 모습보다, 편안한 가정에서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우리는 날마다 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이 기쁨에 못 이겨 옷이 벗겨질 정도로 춤을 췄습니다. 그 장면을 본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다윗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 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미갈의 눈에는 다윗의 벗겨진 옷이 민망해 보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이자 왕인 다윗이 자신의 여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낸 것에 대해 불쾌함을 느낀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궤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신의 남편으로서의 다윗을 바라보느라 그와 함께 들어오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그날, 미갈만큼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이스라엘의 백성인 것을 잊고 오로지 다윗의 아내로서의 신분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기뻐하는 이스라엘의 백성 중 하나였다면, 그녀가 받을 복이 있었겠지만, 아내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자신이 가진 신분과 영광을 바라보느라 하나님의 궤를 찬양하는 본질을 잃어버린 미갈은 오히려 자신의 위치가 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의 관계에는 세상의 순리가 작용합니다. 부모의 관계, 부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다해야 할 역할이 있고, 그 직책에 전념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관계를 정하고 모든 섭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곧 가정이라는 편안하고 안정된 울타리 속에서 영적 긴장감을 적절히 갖지 않는다면, 가정이라는 축복이 도리어 책망과 훈계의 채찍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주면 민족 대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많은 친인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남편을 무시했던 미갈의 모습이 아닌, 모든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로 세우며 영적인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다윗의 모습을 가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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