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밖에서 보면 비극, 안에서 보면 희극
한 때 유대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뒤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그의 형제들은 그가 결박당하는 환상을 말하며 그를 말렸지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말하며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크게 분노하며 그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자신이 당한 고발에 대해 상소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바울이 순교한 곳입니다. 그리고 수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파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바울이 로마로 향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3달을 머물렀던 멜리데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 위해 이달리야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이 배는 이백칠십육 명이 탈 만큼 거대한 배였습니다. 문제는 항해하는 날짜였는데,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시기인 10월 안팎으로 항해가 쉽지 않은 기간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 항해를 주관하는 백 부장에게 말했지만, 백 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결국 그 배는 바울의 말처럼 광풍을 만나게 되었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14일 동안 식사도 하지 못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자신이 가이사 앞에 마침내 서게 될 것을 확신했고, 선장과 백 부장을 대신해 고난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이백칠십육 명을 지혜롭게 통제하여 결국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고 한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이 오늘 설교의 본문 제목에 있는 멜리데섬입니다. 이 섬에서 바울은 세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 그를 가이사를 만날 것이라고, 로마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나, 바울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도착해 세 달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는 주었지만, 광야의 40년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은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과 달랐습니다. 광야에서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풍족함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과는 달리, 바울은 멜리데섬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그는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고, 멜리데섬에 있는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며 그곳에서도 복음을 기반으로 한 능력을 행하며 사람들의 육신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목적지라면 광야는 그들에게 고난으로 해석되지만, 하나님이 목적지라면 광야는 그들에게 고향으로 해석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수많은 기적을 쓰고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으며,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의 목적지가 로마 그 자체였다면, 바울이 항해를 하며 만난 광풍과 멜리데섬은 고난으로 해석되겠지만, 바울의 목적이 복음 그 자체라면, 이 모든 과정과 장소는 복음을 전할 틈,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사명을 행할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지는 천국 그 자체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향해 가는 우리의 걸음을 막습니다. 광풍을 불게 합니다. 물속으로 가라앉게 만듭니다. 그래서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광야라는 곳으로, 그리고 우리만의 멜리데섬으로 우리를 보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고난'으로 받아들여 이것이 하루빨리 지나가길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한 평안이 있는 천국이기 때문에 그 길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모든 곳은 그들에게 '고난'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에이~ 목사님.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는데, 그게 당연히 고난이지 않나요? 바울을 보세요.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로마까지 가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기고 고발당한 내용도 거짓이고 거기다가 폭풍으로 난파될 위험까지 겪었으니 고난이 맞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형제의 입장에서 바울의 삶을 바라볼 때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그의 형제들이 바울이 잡히게 될 환상을 보고 그의 길을 막았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형제의 입장에서 바울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은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의 입장에서 바울의 상황은 '고난'이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자신이 당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떠나면 다시는 형제를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길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으로 다른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들이 그를 보며 '고난' 중에 있다는 평가가 정작 그 스스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 '고난을 기뻐하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당하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것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것은 형제로서의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평가할 때는 사도 바울과 같은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상황을 마지못해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보며 이것은 나의 기쁨, 'It's my pleasure!'라고 선포하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호주에 있을 때, 첫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외국인 친구가 주기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선물을 해줬습니다. 옷이나, 인형, 열쇠고리처럼 다양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전 그러한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고마운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한국인이 원래 호혜의 민족이지 않습니까? 받은 만큼 갚는 민족. 축의금도 상대가 낸 만큼 내고, 생일 때 케이크 쿠폰 보내준 친구를 기억했다가 그 친구 생일 때 다시 쿠폰을 보내주는 그런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우리가 선물을 이렇게 많이 받아서 좀 미안하다고 말하니,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족에게 선물 주는 기쁨을 계속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어'. 'It's my pleasure.'
누군가를 도와주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라고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이전에는 그 말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받는 것을 기대하며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그 자체게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 뿐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에 깊이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도 하나님께 복을 받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겪는 이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선물로 주실 거라 믿습니다. 헌금을 꾸역꾸역 잘 내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더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거라 믿습니다. 과연 내가 하는 이러한 영적 투자는 정말 그만한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까요? 죄송합니다. 택도 없습니다. 혹시 지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그 고난이 여러분이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지나가면 그보다 더한 것이 여러분을 억누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지, 그 구원으로 가는 모든 세부적인 길을 보여주시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구원으로 향하는 그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13-14). 그러면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약속해 주셨지만, 그 길은 좁아 가는 자들이 없어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고난으로 가득할 텐데, 너희는 그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셉이 모든 형제들이, 그리고 일곱 곱단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환상을 봤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나간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받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보디발의 종일 때에는 그가 모든 일을 맡길 만큼 성실히 일했고, 옥에 갇혔을 때에는 간수가 모든 일을 맡길 만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혹시 요셉이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한테 환상을 보여주셨으니, 내가 이 나라에서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할 때까지 꾹 참고 버텨보자'. 만약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보고 이런 마음을 가졌다면,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을 때부터 좌절에 빠졌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상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해 보십시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 질문에 살아남지 못하는 바람은 과감히 내 던지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그것이 그 질문에 살아남는다면, 기뻐하십시오. 어떤 코미디언이 TV에서 그러더군요. 코미디언의 삶은 밖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안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밖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안에서 보면 희극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