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렌즈를 통해 다시 바라보는 삶
어렸을 때, 생일 선물로 받았던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책 안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현란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있었는데, 겉으로 보면 이미지가 흩어져서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파란색, 한쪽은 빨간색 셀로판지가 붙어있는 안경을 끼면, 그 이미지가 정확하게 입체로 나타납니다. 입체로 나타나는 그림이 너무 신기해서 그 책을 얼마나 자주 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셀로판지 안경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 책은 더 이상 펼쳐보지 않았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책이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신이 겪는 일의 인과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자신의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이 잘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이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어떤 일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어떤 일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인과관계를 판단합니다. 특히 인과관계를 특정할 수 있는 시기가 짧으면 짧을수록 그 판단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집니다. 가령 차가 막혀 직장에 늦으면 지각한 이유는 교통체증이 확실하고, 길을 가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 넘어진 이유가 갑자기 튀어나온 돌, 혹은 자신의 부주의가 확실하다 여깁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러한 단편적인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그 이상의 사고를 갖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간증을 할 기회가 되면, 과거 나를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말하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나간 그 긴 시간을 돌이켜보고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믿음 안에서 선하게 바뀐 것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건을 믿음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여전히 나에게 믿음의 삶을 고무시켜 주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매일마다 일어나는 사사로운 모든 사건을 믿음의 렌즈를 통해 보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이성적인 과정이지만, 이 과정에 믿음을 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우리가 겪는 일에 '우연'이라는 생각을 더할 수 있고, 그 우연이라는 틈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매우 사사로운 일, 심지어 여러분이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난 것이 하나라도 있다고 믿으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가 겪는 모든 순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판단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보이지 않게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렇게 지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돼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1-12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 전부터 자신의 아들들을 미리 정하시고 그 뜻에 따라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셨다. 우리의 구원을 미리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뜻을 완성하는 도구로서의 계획까지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적으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 속에서 불평합니다. 믿음이 조금 있으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 속에서 자신이 고난을 겪는 이유에 대해 묵상합니다. 그러나 순전한 믿음이 있으면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유를 아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모든 부분에 개입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나를 빚어 가시며, 반드시 승리의 역사로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젊은 청년 시절에 섬기던 교회의 한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청년들이 상담을 할 때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라는 추임새를 말끝마다 붙이셨습니다. 어떤 청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어서 말씀을 드렸더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어떤 청년이 계획대로 일이 잘 되지 않아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나 '참 감사한 일입니다' 말씀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청년부의 청년들에게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고, 어떤 청년은 이 일이 왜 감사하냐고 전도사님에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불만을 가진 청년들의 요는 무엇인가 감사하다고 할 때에는 감사한 이유가 명확히 표현될 수 있어야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이지, 무턱대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에서 진짜 감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전도사님과 꽤나 가깝게 지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정말 온몸을 다해 감사하며 사셨다는 것을. 삶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이 믿음으로 감사한 삶보다 앞서도록 허락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저자인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넘기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다메섹을 지나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바울은 눈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을 기도하며 지낸 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통해 다시 눈을 뜬 사울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8). 성경은 벗겨졌다고 말했지만, 전 이것을 '셀로판지 안경'을 쓰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이는 가장 늦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 만삭이 되지 않았을 때 출생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8절 읽기) 자신의 출생은 그에게 감추고 싶은 과거이지만, 고린도전서에서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라고 고백할 만큼 바울은 자신의 작은 모습을 빗대어 그리스도의 큰 은혜를 표현하길 즐겼습니다. 믿음의 렌즈를 통해 숨기고 싶은 자신의 출생 이야기가 찬양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렌즈를 통해 본 것은 비단 자신의 약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과 모든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 사람이었고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성공이 예정된 사람이었으나, 바울은 세상을 위해 쓰는 자신의 지식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8).
제가 한 때 좋아했던 입체 그림책은 셀로판지 안경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믿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지 않으면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역시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봤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빼낸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귀신 들린 여종은 점을 치는 일로 주인들에게 이득을 주었는데, 귀신이 떠나 더 이상 여종을 쓸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이 그들을 고발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옥에 갇힌 배경을 두고 사도행전은 상관들이 명령하여 바울과 실라를 매로 많이 친 뒤에 깊은 옥에 가두어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다고 합니다. 곧 그들이 행한 일을 가벼운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을 내쫓은 일로 중범죄 처벌을 받은 바울과 실라가 그 어두운 옥에 갇혀서 한밤중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이 쉽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 수 있는 상황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기도와 찬양 후에 큰 지진이 나며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릴 뿐 아니라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키던 간수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모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빼서 자결하려 하자 바울이 옥에서 나가는 일을 멈추고 그 간수에게 자신들이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며 그를 붙듭니다. 도망가기도 바쁠 텐데, 바울은 그 짧은 순간에도 믿음의 렌즈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옥에서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간수를 살리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바울과 실라는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되자 상관들의 부하가 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나님은 바울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사용하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히든, 매를 맞든, 원수가 악한 계획을 세우든 그것은 바울이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통해 이루실 선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든, 억울한 일을 당하든, 원수가 나를 공격하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내 과거를 믿음을 통해 보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믿음을 통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겪는 모든 일을 믿음을 통해 보십시오. 하루의 마지막 기도가 절망이 아닌 절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