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Park Jan 23. 2024

짙은 죄 (막 3:20-30)

무관심의 죄를 짓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가 흔히 '죄를 지었다'라고 말할 때는 사실 그 죄가 어떤 종류의 죄인지 듣기 전까지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죄이든지 자신이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하면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에 대한 내용보다,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행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죄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자신의 이윤을 위해 이웃을 해하거나 거짓된 심판을 하는 것, 불의한 재물을 사랑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품는 것 등 인간이 육신으로 행하는 죄는 이것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독특한 죄가 하나 등장합니다. (본문 28-29절 읽기) 여러분은 성령 훼방죄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죄는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죄 중 가장 무서운 수식어를 갖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용서받는 죄의 크기를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합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과거를 묵상하며 죄인 중 괴수인 자신이 용서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죄를 용서할 만큼 크지는 않다고 가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성령 훼방죄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 가장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본인이 사역을 하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적을 행할 때 조용히,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 싶은 것은 능력 있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 땅에서 피할 수 없는 사역이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저 예수님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기는 장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분의 신분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보다 조금 앞 절인 24-2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4-27).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어 쫓는 일이 많은 사람을 군중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보며 예수님이 바알세불 귀신에 들렸다는 망언을 내뱉었습니다. 이러한 말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집'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마귀는 자신의 나라와 집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화합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지혜롭고 강해도 자신의 주인이 된 마귀를 지배하거나 내어 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마귀를 내어 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그들을 결박하고 강탈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서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주된 사역으로 두신 것은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서 주인 노릇하며 인간을 속박하는 악한 영을 내어 쫓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동시에 잡힌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사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귀신 들린 사람을 찾는 것이 모레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동네에 몇 명씩 있을 만큼 매우 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을 권능을 허락한 것은 예수님 혼자서 그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귀신 들린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소문으로 들었던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만나는 자들마다 귀신이 떠나간다는 소문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 중 서기관들만큼은 예수님의 그러한 능력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사역을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훼방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단순히 육신의 일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그 본질이 다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이 땅에서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행위의 중심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오늘날 세상을 보며 죄가 만연하다 말합니다. 사실 죄가 만연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 처음 부름 받은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과 계획들을 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억울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핍박은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오늘날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과거보다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죄의 오늘의 죄는 그 모양이 다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에굽의 바로 왕 앞에 서서 그의 꿈을 해몽해 주었을 때, 바로 왕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41:38-39). 고대 근동지방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신이 아닌, 요셉의 하나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많은 에굽 주민들이 자신의 나라와 신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그가 진정한 신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기생 라합은 그들에게 현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0-13). 가나안의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행한 일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자, 진짜 신이 누구인지 대결해 보자고 엘리야가 갈멜 산에 수백 명의 바알신 숭배자들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그 자리에 모인 바알신 숭배자들을 악하다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적어도 진짜 신이 누구인지 꼭 확인하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행한 일을 보고 혹은 듣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신지 확인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들이 가진 지식과 물질로 삶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신앙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신이 믿는 신과 우리 하나님 중 어떤 것이 진짜 신인지 확인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오히려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내 신이 곧 너의 신이고 너의 신이 곧 너의 신이라는 종교 통합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를 불러 이 세상을 멸하시겠다고 했던 그때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든 세상이 악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창세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 가운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구원 계획이 노아를 통해 즉각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약 100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는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향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관심'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죄는 이처럼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을 쳐다도 보지 않는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했다가 불뱀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뱀들이 떠나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들이 그것을 보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고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식입니다. 그냥 고개를 돌려 한 번 쳐다만 보면 죽을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관심은 그 고개를 돌리는 일 조차 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관심이 결국 세상을 심판하는 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말합니다.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망하게 하려 작정한 '성령 훼방죄'입니다. 전 시대의 어두움을 분별하는데 이러한 죄의 모양을 반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세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무관심, 진짜 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무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교회가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여기고 그것의 문제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돌아보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비난이 실질적인 잘못과 실수에 기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비난의 목적이 마치 예수님을 찾아온 서기관들과 비슷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비방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실상은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는 것 자체를 미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교회가 망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행하는 선행을 위선으로, 목사의 사역을 직업으로, 말씀의 복음을 거짓으로 둔갑시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귀신의 힘을 힘입었다 말하는 것처럼,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세상의 힘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 교회가 당할 환난에서 우리가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 21:16-17). 우리는 인생에서 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더 깊은 죄로 들어가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향해 가는 은혜의 발판으로 삼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닌데도 성령을 훼방하려 작정한 자들이 우리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 우리가 당할 고난에서 우리의 모습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21:15),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8-19). 뎃생을 할 때, 밝게 빛나는 강한 햇볕을 그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이를 더 하얗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어두운 곳을 더욱 어둡게 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짙은 어둠은 곧 더욱 밝은 빛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 속에서 옅은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히 빛나는 빛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의 말씀 (시 119:96-10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