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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고(keep) 지키라(guard)

삶의 성패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킬 것은 오직 복음입니다.

by Sue Park

디모데후서 1장 13-18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6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네로왕의 통치 시기에, 바울은 옥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후임 중 한 명인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짧게 서술하며 마음을 지키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자, 15절에 모든 사람으로 표현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름이 언급된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그 일의 주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그를 찾아오며 자신이 가진 신앙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한 때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구원을 누렸던 자들이 막상 자신이 가진 신앙이 드러나면 옥에 갇혀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찾아오자 신앙 공동체를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쉽게 퍼져나가 아시아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한 지역에 있는 모든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서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믿음의 길은 우리를 일관되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어쩔 땐 영광스러운 자리로 찬란하게 우리의 삶을 이끌기도 하고, 어쩔 땐 대역 죄인이 된 것처럼 비방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어둡고 눅눅한 곳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기도 합니다.


누구나 좋은 길에 서 있을 때는 내 신앙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전쟁이 나지 않은 나라는 자신들이 가진 전쟁 물자가 부족한 것과 나라를 지킬 병사들이 제대로 훈련되지 못했다는 것을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많은 자들이 회개하고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의 역사가 불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핍박이 거세지고 교회는 약해지고 믿는 자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시험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잡혀간 바울을 모른 척했고, 또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배교하여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시험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더러는 이들을 팔아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앙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본문인 13절과 14절을 읽겠습니다. (13-14절 읽기) 13절의 ‘지키고’는 헬라어와 영어 성경으로 ‘keep’을, 그리고 14절의 ’ 지키라 ‘는 헬라어와 영어 성경으로 ‘guard’를 사용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지키고 ‘, ’ 지키라 ‘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라(13)

영어 단어 ’keep’은 내 안에 이미 주어진 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간직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즉, 13절에 언급된 ‘지키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방향을 올바른 곳으로 향해 복음의 진리를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내적 전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은 겉으로 보면 항상 외교적인 문제와 전쟁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시기를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전쟁이 없는 시기로, 반대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전쟁이 극심한 시기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평화롭든 혼란스럽든 상관없이 항상 전쟁을 벌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단 위의 불이 항상 꺼지지 않도록 명령하셨고, 제사장들은 24시간 365일 제단의 불을 지키며 이스라엘이 화를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불을 꺼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는 은혜가 있었겠지만, 이 불을 물리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제사장 입장에서는 이 일이 어지간히 부담스럽고 까다로웠겠습니까? 이처럼 이스라엘이 외적 전쟁이 없을 때조차, 성전 안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을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 이것이 오늘 바울이 13절에서 언급한 ‘지키라 ‘, ‘keep’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성패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심장부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에 달려 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의 성패 역시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의 복음에 대한 불씨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내면의 불씨를 잘 지켜 내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고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이 생겨나며 교회에는 충직한 일꾼들의 섬김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내면의 불꽃을 지키는 일보다 외적인 충성과 헌신이 우선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007년에 한 교회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팀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출국 한 지 약 일주일 뒤에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가 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의 교인들은 정부의 교섭으로 모두 무사귀환 했지만,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두 명은 살해당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선교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성도들의 내면을 돌보지 못한다면, 그러한 선교는 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선교의 자질을 순교의 각오로 연결 짓습니다. 순교할 각오가 없는 사람은 선교를 떠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지역으로의 출국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거나 분쟁 지역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국한 사람들은 대부분 20대로 이루어진 청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순교를 각오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사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다시 자신의 삶을 시작할 예정인 사회인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나이는 영적으로 철저히 훈련되었다고 보기에 다소 부족한 나이였습니다. 제가 목회자 안수를 받을 때, 목회자 최저 연령이 32세였습니다. 혹자는 복음을 담당하는 데 나이 제한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신앙이라는 영억에서조차도 그만큼 배우고 경험하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이 사건은 오늘날 교회가 형식과 프로그램에 몰두되어 성도에게 요구되는 외적 자질이 그들의 본질적인 내적 성숙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모습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이 잡히기 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신실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잡혀 그와 함께한 자신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자 그를 버려두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속 빈 강정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을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하십시오. 그래서 고난의 때가 찾아왔을 때, 두려움으로 도망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의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아끼 않고 바울을 끝까지 격려했던 오네시보로의 이름으로 기록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

14절에 기록된 영어 단어 ‘guard’는 외부적인 침입으로부터 지켜내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즉 ‘keep’은 자신의 내면을 지키는 일이라면, ‘guard’는 내 외부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군사적 행위에 가깝습니다. 파수꾼이 성문을 지킬 때, 그는 앉아서 묵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양치기였던 다윗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단순히 양을 인도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격하는 곰이나 사자를 향해 칼을 들고 싸웠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내면의 성장과 함께 외면의 행위가 뒤따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말에서 잘 봐야 하는 단어는 바로 ’ 지키라 ‘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공격’이 아니라, ‘수비‘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복음이 전해지는 일은 행위적 능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로 인한 수동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담을 가집니다. 그러한 부담의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이 한다는 오해 때문입니다. 세상에 전해진 어떠한 복음도 사람을 통해 성취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 3,000명이 회개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숫자에 놀라지만, 사실 그전에 성경은 이미 그 일이 성령의 역사인 것을 정확히 명시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시작은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즉, 베드로의 설교와 그것을 들은 자들의 회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이와 동일하게 발생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이 있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가 오면 나를 통해 복음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수동성이 복음이 가진 첫 번째 특징이라면, 두 번째는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가진 복음에 대한 대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으로 이 땅에서 존경과 찬사를 받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것과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멸시받고 조롱당하며 십자가를 달린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오네시보로는 이러한 고난의 시간에 자신이 가진 신앙의 담대함을 보여주며 바울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죽기 전에 쓴 마지막 편지가 이 디모데후서라는 점을 볼 때, 그 당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로마의 박해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다른 죄로 잡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잡혀 사형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바울을 찾아가 그를 위로하는 오네시보로를 어떤 군인이 잡아 “너도 예수의 제자냐?”라는 질문에 그가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다면, 그 역시 바울처럼 잡혀 똑같은 처지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죄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모두 잡아가기 때문에 바울은 16절에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대하게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16),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17) 그는 힘들게 용기를 내서 한 번, 두 번 그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를 찾아가며 복음을 부끄럽게 여지기 않는 모습으로 바울을 격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에게 전한 이 말씀은 오늘날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13-14절 읽기)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복음의 불씨를 잘 ‘keep’해서 세상의 위협과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잘 ‘guard’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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