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에게 가르쳐야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바로 그것의 생명력입니다. 세상에서의 가르침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지식을 열심히 가르쳐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디자인 분야를 보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과거에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코렐드로우가 디자인의 ‘정답’처런 여겨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토샵 단축키를 완벽히 외우고, 레이어를 다루는 기술을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마스터해야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누구보다 빠르게 다룬다는 것이 곧 실력자이자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익숙한 메뉴는 바뀌고, 도구는 재편되고, 작업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의 절반은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기능을 외우고 책을 사서 읽고, 밤을 새워 따라하고, 수업을 들으며 변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또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습니다. 애프터이펙트, 스케치, 프로크리에이터 등 기존 프로그램과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른 도구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과거에 일러스트레이터를 완벽히 마스터한 디자이너라도 이러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우지 않으면 작업 현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노력을 거의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리고 이들의 모든 수고를 대체하는 AI가 등장했습니다. 예전에는 수십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었던 이미지가 프롬프트 몇 줄이면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디자인의 기본기보다 ”어떤 명령어를 선택하고 조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AI의 등장으로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AI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이제 디자인을 넘어 예술이라는 영역은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디자인과 예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작년 입시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점수가 높으면 무조건 지원해야 한다는 의대에 대한 경쟁률이 올해 꺾이며 ‘의대 불패‘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작년만 해도 학생과 학부모 모두 의대만 가면 가장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흐름이 바뀌며, AI의 등장은 의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이제는 의사조차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업무는 AI가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더구나 정부의 AI관련 지원 정책까지 겹치면서 작년엔 그토록 뜨거웠던 열기를 올해부터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전 이제 물어보고 싶습니다. 내년 입시에는 무엇이 가장 인기가 있을까요?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질문하는 통계에서 상위권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교육 부담‘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에게 앞으로 다가올 날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그 다가올 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사교육 비중이 점점 늘어단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단순히 학원 뿐만 아니라, 특정 과목 과외를 비롯해, 입시 컨설팅, 특목고 준비반, 영재원 준비 등 여러 종류의 사교육을 당연한것 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부모들의 마음 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 아이는 뒤처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사교육은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마음 속에 가진 불안감을 낮추는 일종의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토록 많은 사교육을 받아도, 오늘 확실해 보였던 그 길이 내일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언제나 변화며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명확한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르침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부모는 영원한 가르침을 자녀에게 물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이 성경이다. 이 책을 따라 살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링컨은 평생 이 성경을 붙들었고, 그 말씀은 그의 인생의 기초가 되었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사교육, 어떤 지식보다 강력한 유산이 된 것입니다. 사교육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앞당겨서 어떻게든 대비하려는 불완전한 시도일 뿐입니다.
내일이 되면, 또 주식시장에 대한 다양한 뉴스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코스피가 상승하면 상승하는 이유 수십가지가 나올 것이고, 반대로 하락하면 또 하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 수십가지가 나올 것입니다. 전 날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지만, 당일이 되면 마치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상승 혹은 하락에 대한 다양한 이유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전문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미래를 어느정도 예상하고 맞출 수 있다는 착각속에 살아갑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피아노 연주에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다음 누르게 될 피아노 건반을 예측하는 일과 같습니다. 제일 많이 눌린 건반과 그렇지 않은 건반을 열심히 분석한다고 해서 다음 건반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러한 연주는 예측이라는 분석이 무용합니다. 대신 감상하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가 완성해 낼 놀라운 연주를 오로지 기대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변화는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그것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변화와 미래를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변화에 맞춰 우리가 바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14-17절 읽기)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네게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14-15)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씀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말씀이 디모데를 지킨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말씀을 품고 자라면 그 말씀이 인생의 많은 순간에서 그들을 지켜 줄것입니다. 부모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을 수는 없지만, 말씀은 어디서든 그들과 함께하며 인도해 줍니다. 물론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에게 예절과 책임감, 정직과 같은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 많은 개별적인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들도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이 본질적으로 세상의 그 어떤 가르침보다 의미있고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결혼을 하면,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것을 문서화 한다고 합니다. 날별로, 요일별로, 혹은 월별로 서로가 해야할 일을 정합니다. 재산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도 정합니다. 친정과 시댁을 일년에 몇번 방문할지도 정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부생활을 보며 계획적이고 현명하다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들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보며 아름답다거나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라는 모양을 잘 유지하기 위해 행위를 문서화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부부라는 관계를 미묘하게 빗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서화된 삶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규칙이 거의 없는 집도 있습니다. 어느날은 남편이 음식을 하고, 또 어느날은 아내가 음식을 합니다. 빨래도, 육아도 바뀝니다. 돈도 있으면 함께 쓰고 없으면 함께 아끼며, 일년동안 시댁을 몇번을 가든, 친정에 몇번을 가든 횟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부생활을 보며 계획적이고 현명하다는 생각은 잘 안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부부로서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은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의 중심에는 규칙이 아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부부생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우리 자녀의 태도에서도 동일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조목조목 자신의 삶을 문서화 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는 지혜롭고 현명한 아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지는 다른 질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그러한 정형화 된 삶의 틀은 없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고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때로는 덜 계획적일지 몰라도 훨씬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자기 계획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어 지겠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수많은 규칙과 예측과 조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안에 거하는 삶. 이것이 한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진짜 비결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며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들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까, 어떻게 변명할까, 왜 하필 이삭일까, 이 뒤에는 무엇이 오게 될까”하며 고민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순종했습니다. 아침이 밝자마자 모리아산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칼을 들어 자신의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티끌만큼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몰랐던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드러났습니다. 수풀에 뿔이 걸린 한 양이 이미 그곳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며 나아가는 동안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순간을 앞서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자녀의 삶 앞에도 이러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계획과 예측이 아닌, 믿음과 순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따라 살면 세상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길이 열리고, 우리가 세우지 못하는 계획이 이루어지고,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공급이 채워집니다. 우리가 바쁘게 노력하면 자녀의 손을 한번 더 잡아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한번 더 닦아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곁에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품을 떠난 자녀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를 마련해 주는 것만큼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고 디모데를 격려한 바울처럼, 그들이 거할 영원한 처소를 준비해 주는 참 지혜로운 부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